음악의 산책/Nashville

[가요] 나뭇잎 사이로 - 조동진

jubila 2023. 9. 13. 06:54

나뭇잎 사이로 - 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어둠은 벌써 밀려 왔나
거리엔 어느새 정다운 불빛
그 빛은 언제나 눈앞에 있는데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 가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세상을 바꾼 노래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1980)

그런 장소가 있다. 눈 내린 산사의 마당처럼 그 곳에 서면 마음의 걸음도 절로 멈추고 고요해지는 장소가 있다. 벽돌의 빛이 바랠 정도로 오래된 성당에 들어서면 경건함이 마음의 함을 열고 번져 나온다. 그런 음악이 있다. 원래부터 있었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곤 하던 맑음과 순수함이 되살아나고, 그윽한 명상에 동참하는 것 같은 순간으로 이끄는 음악이 있다. 조동진의 노래가 그렇다.

영화감독 조긍하의 아들로 영화에도 뜻을 두었다는 조동진은, 그러나 스무 살이 되던 1966년부터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니 한국 그룹사운드와 대중음악의 역사에 일찌감치 발을 딛고 있었던 것이다. 통기타 그룹과도 함께 했고, 쉐그린(Shagreen)과 ‘동방의 빛’에서 연주했으며, 작곡가로 양희은•윤형주•김세환 등 여러 동료들에게 자신의 곡들을 부르게 했지만, 정작 자신의 얼굴을 세상에 바로 드러내진 않았다. 첫 번째 솔로앨범은 그가 서른을 넘기고서야 빛을 보게 된다.

10년이 넘도록 묵묵히 채워오다가 발표한 1집 [조동진](1979)은 삶과 세상을 관조하는 시선과 음악적 명상이 느림과 비움을 거쳐 비로소 스미어 나와 채워진 그릇이었다. ‘행복한 사람’과 ‘겨울비’ 등이 줄지어 선 노래들과 조동진 스타일의 모던 포크는 성찰이었고, 시적인 사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탄생한 [조동진2](1980)는 보다 세련된 사운드 안 세상과 머리의 파동을 멈추게 하는 힘을 담아냈다. ‘나뭇잎 사이로’가 비춰지는 순간이었다.

 조동진은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한 축을 직접 세운 장본인이다. TV가 아니라 음반과 공연 활동을 천천히 해나가는 것으로도 노래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그만한 힘이 있었다. 물론 라디오는 그의 노래를 실어 나르느라 바빴고. 또한 깊은 서정과 음악적 모양이 어떻게 합쳐져 하나의 노래가 되는가를 알려준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표상이 된다. 조동진이 기타를 메고 ‘나뭇잎 사이로’를 부르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주인공과 아사코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련한 사랑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조동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노래에 담아낸 시인이기도 하다. ‘제비꽃’과 ‘겨울비’가 그렇듯이, ‘진눈깨비’와 ‘빗소리’ 그리고 ‘달빛 아래서’가 그렇듯이, 그의 노래는 환경과 인간, 계절과 시간의 이야기를 포착해왔다. ‘나뭇잎 사이로’는 바로 이러한 언어와 정서가 압축되어 있는 명곡이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은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로 넘어가는데, 각각에는 “너의 야윈 얼굴”과 “사람들 물결”이 대항을 이룬다. 그리고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에서 “너의 작은 꿈이”로 흘러간다. 작은 자연에서 도시로, 그리고 다시 우주로 확장되고, 한 사람에서 여럿으로, 그리고 다시 꿈•영혼으로 들어간다. 맑은 기타의 울림을 동반하는 이 노래는 한편의 시화(詩畵)이다.

조동진이 존경받는 이유는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후원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조용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들인 조동익과 조동희 뿐만 아니라 1980년대의 동아기획과 1990년대의 하나뮤직은 조동진이라는 나무가 없었다면 싹을 틔우지 못했다. 한국에 ‘○○○사단’으로 불리는 그룹이 몇몇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조동진 사단’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조동진의 노래는 장필순에게 이어졌고, 장필순은 또 다른 이들의 뿌리가 되어주었다. 결국 현재의 모던 포크 싱어-송라이터들의 근원에는, 아니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불빛에는 조동진이 그림자가 서려 있는 셈이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조동진의 노래와 그의 삶이 그런 것 같다. “먼지도 쌓이면 두께를 갖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조동진의 무겁지 않은 노래들, 일상의 한 장면들을 잡아놓은 노래들이 일으키는 큰 감동이 그런 것 같다. 살다보면 어떤 면에선 한걸음 다가가야 하고 어떤 면에선 한걸음 물러나야 한다. 나는 조동진의 음악에서 바로 그것을 본다.


이러한 조동진씨는 2017년 방광암으로 투병하다 마지막공연을 앞두고 안타깝게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