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가요] 꿈속의 사랑 - 현인

jubila 2023. 1. 18. 08:06

꿈속의 사랑 - 현인










꿈속의 사랑

현 인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못하는 내가슴은
이밤도 울어야 하나

잊어야만 좋을사람을
잊지못한 죄이라서
소리없이 내가슴은
이밤도 울어야 하나

오~ 사랑 애달픈 내사랑아
어이맺은 하루밤의 꿈
다시 못볼 꿈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뜨지 말것을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소리없이 내가슴을
이밤도 울어야 하나







 

 







 

 







"夢中人"은 上海老歌(상하이 옛 노래)로 현인 선생이 리메이크해서 부른 '꿈속의 사랑'의 원곡이다.
원곡자는 영화배우이자 가수 龔秋霞(공추하)이고 1942년 영화 <薔薇處處開(장미는 도처에 피어)>의 삽입곡이었다.  이 노래는 중국에서 너무 잘 알려져 있고, 버전도 최소 10개 이상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곡은 1980년대 대만가수 蔡琴(채금)이 부른 夢中人(몽중인)이며, 두번째로 포함된 곡은 채금이 1995년에 부른 곡이다.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는 "꿈속의 사랑"은 1949년 현인 선생이 번안해 불렀고, 그 밖에도 장윤정, 채은옥, 김정호, 심수봉, 주현미, 나훈아, 이광조, 남진, 현철, 조미미, 신신애 등이 부른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현인은 1919년 아버지 현명근과 어머니 오봉식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일제강점기 경남 양산에서 잠시 유년기를 지내기도 한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의 댁이 있던 동래를 오가며 성장하였다. 이후 석유 회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 지사의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나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라핀 독창회를 보고 처음으로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31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현인은 학교의 배구 대표 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 하였고,  방과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연주하기도 하였다.


1928년 일본 육사에 진학하기 위해 도쿄로 갔지만 방향을 바꿔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일본 유일의 관립 학교인 도쿄음악학교는 당시 음악 엘리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음악학교 진학을 너무도 불쾌하게 여긴 아버지가 학비 관련 지원을 끊자 현인은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1년 뒤 NHK 합창단의 모집 광고를 본 현인은 오디션에 응시하여 단원이 되었으며, 
유학 시절 왕족 출신의 마리코와 연애하기도 했다고 하나,  곧 귀국하여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하였다.


1939년 고토 진(後藤 仁)으로 창씨 개명하였는데,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玄仁)은 고토라는 성만 현으로 바꾼 것이다.  1942년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하였고,  1943년 동료들과 악극단을 구성해 텐진, 베이징, 항저우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 패망 후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인은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 경음악단을 조직하였고, 1947년 29세에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해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이 무렵 현인은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과 같은 곡을 번안해 노래하여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며,  1952년에는 에디트 피아트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스타가 된 현인은 이후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잇달아 히트시켜 1950년대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현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고,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하지만 1957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아내 박정혜와 이혼하였고, 1959년에는 봉봉쇼단이 재정난으로 6개월 만에 파산하였다. 결국 현인은 1974년 56세에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세 번째로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하고 1981년 다시 귀국하였다. 1981년부터 1999년까지 근20년 동안 <가요무대> 등 여러 방송에 출연하였고,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어 2002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해방 이래 앨범을 발표하여 데뷔한 가수는 현인이 처음이었기 대문에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꿈속의 사랑"은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것이 1949년이니, 벌써 7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아직 귀를 행복하게 해 줄 정도로 아름답다.  대만가수 蔡琴의 노래도 꼭 한번 듣기를 권한다. 명곡이란 시간이 흘러도 변치않는 사랑을 줄 수밖에 없는 빛나는 존재인가 보다. 이 노래는 차후 다른 사람이 부른 버전도 한번 더 소개해도 좋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