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라틴] Bamboleo - Gypsy Kings

jubila 2021. 7. 16. 17:57

Bamboleo - Gypsy Kings

 






Bamboleo 

Gypsy King



Este amor llega asi esta manera
No tiene la culpa
Caballo le ven sabana
Porque muy depreciado,
Por eso no te perdon de llorar
Este amor llega asi esta manera
No tiene la culpa,
Amor de comprementa
Amor del mes pasado
Bebele, bembele, bembele

Bamboleo, bambolea
Porque mi vida, yo la prefiero vivir asi
Bamboleo, bambolea
Porque mi vida, yo la prefiero vivir asi
No tiene pardon de dios
Tu eres mi vida, la fortuna del destino
Pero el destino tendressa para dos
Lo mismo yo que ayer
Lo mismo soy yo
No te encuentro a l'abandon
Es imposible no te encuentro de verdad
Por eso un dia no cuentro si de nada
Lo mismo you que ayer
Yo pienso en ti
Bamboleo, bambolea

Porque mi vida, yo la prefiero vivir asi
Bamboleo, bambolea
Porque mi vida, yo la prefiero vivir asi
Bamboleo, bambolea

Porque mi vida, yo la prefiero vivir asi
Bamboleo, bambolea
Porque mi vida, yo la prefiero vivir asi














집시


무소유와 자유라는 두가지 특성을 지닌 집시 민족에게 유랑의 길은 필연이었다.


집시의 유래를 그 근원을 찾게 되면....
그들이 고향과도 같은 인도의 편잡지방을 떠나 실크로드를 거쳐 흑해연안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의 각지로 이동하기 까지 집시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무소유와 자유라는 색채를 잃어버리지 않고 때로는 타문화 속에 들어가 영향을 주고 때로는 타문화의 다양함을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를 결코 잊은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종교보다 겸허한 이들의 마음이 닿을 수 없었던 곳이 지구상에 단 3곳이 있었다.

그 곳은 동토의 아이슬란드와 일본, 그리고 한국이었다.
물론 식민시대를 거쳐 분단상황이라는 시대적 아픔이 이들을 막았던 것일까? 아니면 남다른 민족적 감정이 가로 막았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닫혀지고 삭막한 문화현상의 일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메신저인 집시의 발길이 닿지 못한 곳 이곳은 어쩌면 그만큼 문화현상의 패쇄성 아니면 다양함의 풍토가 자리잡지 못한 현상이니까.

모든 집시들은 그랬다.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 결코 물질에 대한 소유욕에 구속되지 않았던 집시들은 사회의 밑구석 사회적 냉대들이 강했다. 종교계 역시 그들을 결코 달갑지 않게 여겼다. 루터역시 노예와 다를바 없는 천박함의 집시라 했으며 칼뱅은 이러한 집시들이 마녀사냥의 주 타켓이었다.

물질의 영속화가 아닌 물질의 무소유를 택했던 집시들의 의식은 그래서 그 어떤 종교보다 더 고귀한 마음이며 정신적 가치라 생각한다.


영원한 유랑 민족의 초상 - 집시


집시에게 따라붙는 두 개의 시선

상대를 왜곡되게 묘사하는 일은 당사자로서는 심각한 모욕일 수 있다. 만일 서구의 유명 예술 작품들이 한국 여인을 자유분방한 요부 정도로 형상화한다면 우리는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게 될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집시들은 아마도 우리를 포함한 문명인들의 집시관에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구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집시, 특히 집시 여인을 신비한 소재로 여겼다. 서구의 창작물에 등장하는 많은 집시 여인 중에서도 대표격인 두 여인은 카르멘과 에스메랄다이다. 카르멘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이다. 맨발로 사뿐히 걸으며 웃음을 흘리는 카르멘은 숱한 남성들의 흠모 대상이다. 돈 호세 상병도 그녀에게 매료되었는데, 그는 짧은 사랑의 행복을 맛 보지만 결국에는 파멸하고 만다. 돈 호세의 비극은 전적으로 카르멘의 집시다운 사랑관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그녀는 한 남성과의 일대일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돈 호세를 떠나려 한 것이다. 돈 호세는 이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호세의 협박과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카르멘이 결별을 계속 고집하자, 돈 호세의 칼이 카르멘의 복부에 깊이 박힌다. 이리하여 견실한 청년이었던 돈 호세는 살인자로 전락하고 만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또 다른 집시 여인을 창조한다. 그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 혹은 소설의 영화판 제명인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집시 여인은 에스메랄다이다. 카르멘은 한 청년을 파멸로 몰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 이상이다. 그녀는 성직자 프롤로를 욕망에 불타오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하층민인데다가 기형아인 콰지모도까지 사로잡은 여인이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숨지는데 콰지모도도 그녀를 따른다. (월트 디즈니사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본 사람들은 해피 엔딩을 기억하겠지만 원작은 비극이다.)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성적 매력으로 충만해 있고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가 집시 여인이다. 그런데 자유의 이미지는 집시 여인뿐 아니라 집시 일반에도 적용된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집시는 절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르지만 거짓일 때는 집시들로서는 분명 불쾌한 모함일 테고 당장 거두어들여야 할 편견이다.

집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은 더욱 부정적이어서 심각한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서구에서 집시는 자유로울 뿐 아니라 부도덕하고 무능한 부랑자로 여겨져 왔다. 그런 편견은 결국 집시가 겪었던 여러 가지 고난을 야기했다. 최근 밝혀진 강제 불임 시술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치 독일은 물론이고 미국, 스웨덴, 벨기에 등 서구 국가에서는 1970년대까지 우생학을 근거로 강제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이의 출생을 막자는 게 그 기본 목적이었다. 구의 위정자들은 가난뱅이와 지진아 그리고 법규 위반자를 잡아들이고 생식 능력을 제거한다면 곧 사회 문제가 일거에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다.

현대 문명의 야만성을 증명하는 강제 불임 시술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정확한 국가별 통계는 아직 없지만 스웨덴에서만 약6만 명 이상이 가족과 본인의 동의없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강제 불임 시술의 희생자 중에는 상당수의 집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집시는 본래 열등하고 위험한 부랑자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런 만행이 거리낌없이 자행될 수 있었다. 서구인들의 집시관은 때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때로는 지독히 부정적이다. 그것은 당연히 집시들로서는 왜곡된 집시관이 원망스럽기만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집시관도 서구에서 전염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슴 속에도 소수 민족 집시에 대한 근거 없는 신비감과 혐오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사의 주변만을 맴돌았던 집시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이 가치가 있다면, 그 이유는 집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시의 기원과 유랑의 역사

정착하지 못해 떠돌아다닐 뿐이고 사회의 주변에 위치하며, 대개 검은 머리칼과 짙은 피부색을 지닌 집시들은 어디서 솟아난 집단인가.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앤터니 퀸 주연의 <노트르담의 꼽추>(장 델라누아 감독, 1957년)에서 답을 찾아보자고 제안할지 모른다. 영화에서 매혹적인메스메랄다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본 파리사람 몇몇이 대화를 나눈다.“저 여자는 대체 뭐지?” 그러자 다른 이가 대답한다. “이집트에서 온 여자이지요.” 15세기 말엽, 정확히는 1487년이 배경인 영화에서 집시는 이집트 출신의 무리라고 설명되고 있다.

엄격한 논픽션 문헌에서도 집시의 기원에 대한 동일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17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최초의 포르투갈어 사전에는 집시가 `이집트 민족 출신으로서 거처 없이 영원히 방랑하도록 신의 형벌이 내려진 무리`로 정의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18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이 집시를 이집트 출신의 이방인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이집트인(Egyptian)의 두음이 소실된 결과 집시(Gypsy)라는 표현이 생겨났다는 설명을 납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느트르담의 꼽추>나 포르투갈어 사전의 설명이 사실일까. 물론 사실이 아니다. 착각 또는 어림짐작일 뿐이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에게 집시는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가끔 마주치는 요상한 무리에 불과한 집시가 신성한 아카데미즘의 연구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유럽인들의 연구가 진행되어, 집시 언이인 로마니(Romany)가 옛 인도 언어 산스크리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수백 년 동안의 통념과는 달리 집시의 고향이 이집트가 아니라 인도 북서부 지역이라는 사실도 확인된 것이다. 집시가 인도의 사회 제도와 무관한 외부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카스트제도의 한 층위에 속했던 집단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지만, 집시의 기원지가 인도의 북서부 지역이며 11세기 초 그곳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류의 위대한 모험이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행해졌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인류는 당연히 유럽인들을 의미하는데, 유럽인들은 태양이 잠기는 곳에 대한 무의식적인 탐구욕에 이끌려 서쪽을 향한 여행을 감행했다는 것이며 그 대표적 인물로 율리시스나 콜럼버스를 예시한다. 유럽 문명인이 아닌 집시도 서쪽으로 향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이동은 위대한 모험심이나 지적 욕구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집시가 방랑을 즐기는 천성을 지녔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1,000년에 걸친 집시의 유랑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설명할 유럽인들의 집시 박해가 유럽에서의 집시의 유랑을 해명하는 열쇠라면, 집시가 고향 인도 북서부 지방을 떠난 이유는 이슬람 세력의 잦은 침략 때문이었다. 6세기에 성립된 이슬람 문명권은 무하마드의 죽음 이후 사분오열되기 시작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영토확장 노력은 계속되었고, 11세기 초에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 지역까지 진출한다. 이때의 이슬람 침략 때문에 집시들은 고향인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비잔틴제국 등을 거치면서 계속 이동한 집시들은, 13세기 중반에 유럽 남서부의 발칸 반도(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구성된 반도)에 도착하게 된다. 집시가 영국, 스페인,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등을 포함한 유럽 전지역에 도착하게 된 것은 15세기 말 또는 16세기경이다.

그들은 개척기의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계약 노동자로 파견되거나 추방되었다. 19세기 동안에는 주로 러시아나 발칸 반도에서 많은 수가 아메리카 등 유럽 외부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현재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후 집시는 끊임없는 이동과 생활 유지를 모두 가능하게 할 기능을 익혔다. 주로 가축 치료, 점성술, 금속 제품 수선 등이 집시의 특기였는데, 특히 그들이 비잔틴 제국에서 익힌 금속 제품 관련 기술은 발칸 반도 지역에 이르렀을 때 효용성이 큰 기능이었다.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을 꽃 피운 것으로 유명한데, 그 문명의 화려함은 당연히 부의 축적으로 가능했다.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은 중세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로서, 특히 사치품이나 금속, 유리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 수준이 그 밖의 유럽 지역과 비교할 때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집시들은 비잔틴 지역에서 금속 관련 기술을 습득하여 발칸 지역 등지에서 필요한 기능성을 발휘하였으며, 이 기술은 그들에게 생활 유지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집시는 끊임없이 유랑을 해야 하는 집단이었기에 뚜렷하고 복잡한 사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사회 조직은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크리스(kris)라는 것으로 이것은 사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규범을 세우고 또한 규범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파문이나 추방 같은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집시 집단들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비스타(vista)라는 대표단의 기구가 있는데, 비스타는 느슨하나마 인근 집시 집단 사이의 연대를 유지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덜하지만 서구에서는 집시들 중에 `집시 킹`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절대 군주처럼 모든 집시들을 일괄 지휘하고 집시들의 추앙을 받는 존재를 기대하는 것인데, 집시 킹은 서구인들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다. 집시 사회에서는 그런 신비한 우두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시들은 소집단별로 위계와 규범을 세우고 생활하고 있다.

집시는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인 공통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집시들의 결혼 의식이나 장례식 또는 세례의 방식들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각 집단이 머물렀던 지역 사회와의 교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어도 그들이 살았거나 거쳐간 지역 언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집시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법에 종속된 존재들로 살아간다. 종교만 해도 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종교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 이슬람, 카톨릭, 기독교등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집시들과 주변 사회의 교류나 동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집시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폐쇄성과 유랑을 집시의 본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실은 집시라고 해서 불안정한 이동과 배타성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고향을 떠난 집시들은 한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박해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이 집시의 정착 가능성을 앗아 갔다. 많은 국가에서는 집시의 차별을 법제화한 경우도 많았으니, 집시가 유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서 그렇게 박해가 지속되었으니 교류의 문을 닫는 편이 자연스럽다. 집시는 주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고 내쫓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랑하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유럽인들의 착각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명명 과정이 부당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집시의 경우에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명백히 집시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시들 자신도 집시라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는 집시들의 원천을 부당하게 왜곡하며 동시에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로마니 민족(Romani people) 또는 롬(Rom)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집시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집시라는 명칭이 일반적 표현으로서 유지될 것 같다. 집시를 경멸하는 일반의 태도는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는 집시 박해의 역사만큼이나 완고한 경향이다.


불가촉의 천민, 집시의 수난사

고대부터 모든 사회는 특정 분파를 일탈 집단으로 규정하여 통제하고 배척해 왔다. 예를 들어 살인자, 창녀, 정신 이상자, 노예 등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대개의 경우 이 일탈 집단들은 우발적 사건이나 사회의 신분 질서에 의해 규정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집시는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공식적 배척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 문명인들은 낯선 떠돌이 집단인 집시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품었고, 그런 편견은 숱한 법제적인 박해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지금 집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집시가 쓴 집시의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의 집시 역사는 서구인들이 제정한 집시 박해 법률의 기록을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집시의 여정이 곧 박해와 수난의 과정이었음을 이 사실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집시는 종종 그들의 고유한 기예 때문에 질곡의 삶에 빠져들었다. 특히 금속 제품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는 그들을 옥죄는 결과를 낳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집시들은 비잔틴 제국을 거치면서 금속 제품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칸 반도에 도달한 후 한동안 그 기술은 생계 유지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집시의 유용성을 인식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집시를 곧 노예화하고자, 14세기 초반 집시들을 고용주의 재산으로 규정하는 법령을 제정한다.

그래서 애초에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난 집시 전체의 절반 정도가 향후 5세기 동안 노예 상태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에 붙박혀야 했다. 루마니아의 경우 1855년에 이르러서야 집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예 신세를 면한 나머지 집시들이 발칸 반도에서 서부와 북부 유럽으로 이동했지만 그들의 삶도 자유롭거나 행복할 수는 없었다.

집시가 유럽 본토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 때문이었다. 13세기 후반까지 약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인들은 이슬람 지배하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그 전쟁은 결국 유럽 사회 전체에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불러왔다. 15세기경 집시들이 유럽 서부 지역에 도달하자, 유럽인들은 집시를 이슬람 세력으로 한동안 오해한다.

집시는 이집트인(Egyptian) 이외에도 터키인(Turks), 타타르인(Tartars) 등으로 불렸던 사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유럽인들에게는 이슬람 공포를 유발할 만한 외모를 지닌 집시들은 그래서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집시가 이슬람 세력의 침략 때문에 고향을 잃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시가 박해를 받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방인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낯선 풍습과 속성을 지닌 집시들이 대거 밀어닥치는 일은 기존 체제에는 위험이 아닐 수 없었고,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발칸반도를 떠나 유럽 본토에 도착한 집시들은 수세기 동안 차별과 박해를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집시가 불가촉 천민, 즉 천민 증의 천민이었다. 실은 많은 경우 집시는 인간이 아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있는 존재였고 때로는 돼지 한 마리 값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18세기 프러시아에서는 집시들의 유랑 생활 자체가 불법으로 여겨져 18세가 넘은 집시는 재판없이 교수대에 매달 수도 있었다.

스페인의 경우를 보면 1499년에서 1783년까지 집시의 의복, 언어, 관습을 금지하는 공식적 법령이 10여 차례 이상 제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539년 최초의 공식적인 집시 억압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함선인 갤리선의 노를 젓는 소모품 노예로 집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네델란드에서는 집시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각했는데, 1695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추방 명령이 내려졌고 그 이후에 발견된 집시에게는 첫 번째는 공개 태형, 두 번째는 낙인, 세번째에는 공개 처형의 처벌을 내렸다.

영국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서의 반집시 법령은 헨리 8세 때부터 제정되었다. 1530년에는, `이집트인 법령(Egyptions Act)`이 제정되어 집시의 영국 이주를 금지했다. 메리3세와 엘리자베스1세에 의해서도 집시는 극형에 처해졌다.

1743년의 한 법령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집시의 모습을 하거나, 이집트인의 모습이나 관습에 따라 방랑하는 자 또 예언하는 자는 모두 부랑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서, 집시가 한곳에 정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집시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해와 편견은 증오심으로 발전하여 집시들을 끊임없이 도피하게 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도 집시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극명한 예는 나치의 집시 대학살이다. 약 40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위험 세력으로 몰려 학살되었던 것이다. 집시 희생자의 수는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에 비하면 적지만, 유럽에 거주하던 집시의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 점을 확인하면 얼마나 철저한 집시 사냥이 진행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집시의 대재앙은 정확히 규명되지도 않았으며 현대 대중들에게도 낯선 정보이다.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양심들이 큰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집시는 여전히 큰 위험을 감내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동구권 지역에서는 집시들의 비극이 더욱 분명하다.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면서 집시는 또 다른 곤경에 처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할 강제적 공권력이 약화되면서 집시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이 되살아난 것이다.

1995년 부활절, 루마니아의 한 마을에서는 교회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성직자와 지방 관료들의 지휘에 따라 사람들은 집시의 집을 향했고 26채의 집시 가옥에 방화를 자행했다. 체코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집시들의 집은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몰락 후 수만명의 집시들이 동구 지역을 탈출하여 독일로 피신했으며, 보호 시설에 수용되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듯이 극우 신나치가 설치는 독일은 집시들에게 안정된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집시는 힘없는 소수 집단이기에 그런 사회적 박해와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집시의 오늘

영화 <집시의 시간>(에밀 크스투리차 감독, 1988년)의 영화적 표현 기법을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이 영화가 마술처림 신비한 현상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이 영화에서 주인공 페르카니는 눈길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력을 지니고 있다. 동전 따위를 벽에 달라붙게 만드는 일은 기본이고 영화의 말미에서처럼 포크를 날려 악한을 응징하기도 하는데, 이 신비한 장면들은 마치 거리에 자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필름에 담듯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철로 옆에서 출산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몸은 2미터쯤 공중에 둥실 떠올라 있는데, 이 모습도 역시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다.

<집시의 시간>이 지향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릴 만한 이 표현기법은, 그 내용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서구인들한테 이방인이며 요상한 집단인 집시를 자연스런 집단으로, 다른 민족들과 공존하고 함께 상호 작용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존재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일하게 집시의 시각에서 혹은 서구인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집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영화를 통해 현대 집시의 삶의 모양을 읽어 낼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한 지역 이그라주이다. 이곳에는 집시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주인공 페르카니는 주술사였던 할머니와 바람둥이 삼촌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년이다. 이 영화의 악당은 중년의 남성 아메드이다. 그는 아이들과 부녀자를 사들여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매춘, 앵벌이, 도둑질 등을 시키고 부를 쌓은 인물이다. 페르카니도 아메드 집단의 일원이 되어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는 돈을 벌어서 사랑하는 소녀 아즈라와 결혼하고, 동생의 다리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메드 등이 머물고 있는 지역에 경찰이 들이닥쳐 아메드의 조직은 와해되고, 병약해진 아메드는 페르카니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페르카니는 아메드와 똑같은 행위를 답습한다. 순수한 소년이었던 페르카니는 이제 일탈자 집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이들을 도심으로 내몰아 구걸하게 하고 좀도둑질과 매춘 등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렇게 해서 숨겨 두었던 돈이 홍수에 휩쓸려 사라지고, 아메드가 그를 배신하자 페르카니는 돈도 순수함도 없이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로 변모한다.

4년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동생과 자신의 아들을 찾은 페르카니는 자신의 불행을 불러들인 악한 아메드에게 복수하려 한다. 아메드의 결혼식 파티장으로 들어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염력을 발휘하여 아메드의 목을 향해 포크를 날린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는 또 다른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결혼식을 망쳐 버린 페르카니를 아메드의 새로운 신부가 쫓아와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집시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다. 정착한 집시들도 많이 있지만 정착 여부에 관계없이 집시는 사회의 가장 주변적인 부문으로 내몰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집시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에 대한 지표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왜냐 하면 집시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통계 작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통계 작업을 어렵게나마 진행할 집시의 정치 기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영국과 같은 개별 국가에서 진행된 통계가 최소한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현재 영국에는 1만 2,600가구의 집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전시간(full-time) 취업 상태에 있는 집시는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집시 특유의 이동 시장을 열어서 수입을 얻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집시의 교육 기회가 다른 어떤 소수 집단보다 낮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집시에 대한 일반인들의 근거 없는 편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집시가 범죄를 쉽게 저지른다고 믿고 집시를 고용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시에 의한 범죄의 비율은 전체 평균 범죄율보다 0.46% 정도 높을 뿐이고, 1992년 영국 경찰은 집시 공동체가 범죄를 양산할 위험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집시는 천성적으로 일을 꺼리는 부랑아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인의 편견도 집시의 열악한 사회적 조건을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 사회의 평균치와 비교할 때, 집시 공동체의 어린이나 여성의 가계 기여도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700년 전 유럽에 첫발을 디딘 집시들처럼 현재의 집시들도 여전히 악의적 편견의 대상이며, 그런 편견이 집시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저해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시들은 몇 가지 국제 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동시에 집시들의 권익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국제 집시 연합(International Romani Union)으로 이 단체는 1971년부터 유엔 경제 사회 평의회의 일원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유니세프와 유네스코에 집시의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인도와의 연계를 위해서도 1970년대 중반 인도 집시 연구소(Indian institute of Rom- ani Studies)라는 연구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집시들의 조직은 무엇보다 인종주의의 극복과 집시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의 학살과 관련된 전쟁 배상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되었듯이 집시가 각지에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정치 권력을 결여하고 있기에 이러한 국제 조직이나 연구 단체들이 힘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 집시의 정확한 인구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직도 이주하는 집단이 많으며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조사가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조사에 따라서 상당히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여러 문헌들은 집시의 인구가 약300만에서 800만 명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그 중에서 많은 수의 집시가 발칸 반도나 옛 소련 등에 살고 있고 서부 유럽이나 중동 지역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에서도 집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집시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도 생활하고 있다. 집시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집단에서 평가한 집시의 수는 앞의 조사와 크게 차이가 난다. 국제 집시 연합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900만에서 1,200만 명의 집시들이 살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1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600만에서 800만이 유럽, 특히 발칸 반도지역에 살고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보브 딜런 감독의 <르날도 앤디 클라라(Renaldo and Clara)>

금세기 최고의 포크 싱어 보브 딜런이 연출한 영화가 있다. 르날도(보브 딜런)와 클라라(사라 딜런)와 또 다른 여인 존 바에즈의 삼각 관계가 영화의 기본축이며, 그들의 투어 콘서트 장면이 또 다른 중심 내용이다. 보브 딜런이 각색과 연출을 담당했으며 또 다른 유명 가수 존 바에즈나 로보타 플랙 등도 출연하니,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유명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78년 제작된 이 영화는 상영 시간이 무려 3시간 52분에 달할 뿐 아니라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았다고 자부하는 <버라이어티 영화 가이드(Variety Movie Guide)> 1994년판에서도 제외되고 있다. 영화를 직접 보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보브 딜런의 광적인 팬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세밀히 정리한 문서를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가장 지성적인 가수의 집시관인데, 보브 딜런 역시 지배적인 집시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영화 속의 여성 집시는 신비하고 헌신적이며 주변적인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집시 여인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우선 집시 여인은 매춘부의 모습이다. 또한 가수로서도 등장하여 낯선 언어로 노래를 부르고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시 여인은 헌신적인 여성이다. 한 백인 남성이 기도를 하며 고통을 삭이고 있는 동안 집시 여인이 집시 특유의 마술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 남성을 달래는 모습이 발견된다. 그렇게 보브 딜런 같은 엘리트 가수에게도 집시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비하고 주변적인 존재일 뿐이다.


집시 음악과 춤

방랑자는 높은 예술성을 지닌다는 가설이 억측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술은 자기 위안의 방편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할 때, 정착과 안주가 불가능하기에 불안정을 감내해야만 하는 방랑자들은 춤과 음악 등의 활동으로 스스로 위안하려 애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랑 집단 집시는 특히 음악과 춤에 뛰어난 엔터테이너였다. 그들은 스페인의 남부 지역인 안달루시아에서 강렬하며 비감어린 춤과 음악의 장르, 즉 플라멩코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스페인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간접적인 표현 수단이었다고 한다. 이 스타일의 음악과 춤은 스페인 전역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전해졌는데, 70년대 유명했던 그룹 `집시 킹스`가 현대화된 플라멩코 음악을 들려 준 대표적 대중 음악가이다. 그리고 실제 집시였던 장고 라인하르트의 재즈 기타 연주 기법에도 프라멩코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고급 음악의 경우에도 집시의 영향은 적지 않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는 바이올린과 침발롬 연주자 등으르 구성된 특유의 집시 오케스트라가 발전하여 현대 집시 음악의 전형을 이루었다.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는 집시 합창단이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하며, 최근 음악 이론가들은 유럽의 고전음악, 특히 리스트, 드보르작, 베르디, 브람스 등의 작품에 집시 음악의 영향이 배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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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아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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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hrFARWMfdg?list=RDUsUmxrw9-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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