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사메 무쵸 / 현인
현인 [玄仁]
1919 경남 구포~ 2002. 4. 13 서울.
대중가요 가수.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다. 우에노음악학교 졸업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샹송과 칸초네를 부르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UN군 위문공연에 참여했고, 팝송을 레퍼토리로 하여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다.
대한민국 첫가수.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현대 한국 대중가요의 첫가수. 해방이 되고 가장 처음으로 음반을 낸 가수였다.
처음으로 메가히트를 기록했고 처음으로 번안곡 히트곡을 내었다. 대한민국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위로가 되었던 가수였다. 현인. 그를 기억한다.
그는 원래 성악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음악학교를 나왔다.
그의 독특한 창법은 그같은 탄탄한 음악적 기초와 이론 위에서 만들어졌다.
전통 대중가요의 구성짐과 새로 밀려드는 미국 팝음악의 세련됨이 과장된
비브라토를 스타카토로 끊는 특유의 창법을 통해 만났다.
그것은 마치 악기소리와도 같았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성과 세련된 창법이 남자다운 멋진 외모와 스타일이 만났다. 그는 스타였다.
그는 어쩌면 해방이 만들어낸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일본을 대신해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군과 더불어 미국의 대중문화도 이 땅에 소개되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전공했다.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을 갖추고 있었다.
새롭게 밀려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과 전통적인 대중적 정서와의 접점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구현해내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첨병이었다. 그는 전통 대중가요의 가수이면서 새로운 이국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가수이기도 했다. 그는 시대 자체였다.
1945년 한반도는 마침내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념갈등과 1950년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그때가 현인의 전성기였다. 오랜 무명생활을 끝내고 가장 힘들고 어렵던 시절 그는 누구보다 전통의 정서와 닿아 있으며 누구보다 세련된 음악으로 고단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행운이며 또한 그 사회에 있어서는 불운이기도 하다. 현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옥같은 히트곡들은 그것을 대변해준다.
얼마나 그는 당시의 대중들에 사랑받고 있었는가.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음반으로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서양의 음악인 성악에 바탕을 둔 그의 창법은 신민요나 트로트 등과 달리 시원한 맛을 내며 해방 이후 가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어서 곧바로 내놓은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시대 국민들의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린 노래로, 그는 일약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1947년 한 해 동안 그는 박시춘, 유호와 손잡고 무려 5곡을 히트시키면서
‘현인시대’를 열었다.
1946년 2월 귀국선을 타다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돼 4개월 동안 베이징 형무소에 있을 때 서울을 생각하며 그가 만들었던 탱고 멜로디는 유호의 가사로 〈서울 야곡〉으로 탄생했고, 그가 즐겨 부르던 중국노래는 〈꿈속의 사랑〉이란 노래로 만들어졌다.
1951년 흥남 부두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월남 가족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는 1952년 〈전우야 잘 자거라〉로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고, 1953년에는 가사에 외국어를 처음 넣은 〈럭키서울〉로 서울 수복의 감격을 노래로 담았다.
그는 또 서구의 새로운 음악을 국내에 소개하는 전령사이기도 했다.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이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번안가요 제1호인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그의 입을 거치면서 히트곡이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던 그는 1947년 여름 무명가수가 천신만고 끝에 인기가수가 된다는 내용의 국내 첫 음악영화 〈푸른 언덕〉(감독 유동일)의 주인공 역을 맡았고, 1965년엔 악극 〈춘향전〉에서 이도령역으로 열연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과 무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결국 7년 만인 1981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1991년 〈노래하는 나그네〉·〈길〉 등 신곡을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으며, 1998년까지도 배삼룡·은방울자매·남진·김세레나 문주란 등과 악극 ‘그 때 그 쑈를 아십니까’를 비롯해 KBS ‘가요무대’ 등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나 2003년 지병인 당뇨로 활동을 중단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고 하여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가 남긴 노래는 1,000여 곡이 넘는다.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한 창법의 그의 노래는 고난과 슬픔을 노래하되,
건강함과 감미로움으로 현실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0년 8월 경주 불국사 앞에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베사메 무쵸 원곡=
Besame Mucho (나에게 많이 키스해 줘요)
/Gigliola Cinquetti &Trio Los Panchos..♪
Besame, Besame mucho,
Como si fuera esta la noche,
La ultima vez
Besame, Besame mucho,
Que tengo miedo a perderte,
Perderte despues
나에게 키스해 줘
마치 오늘 저녁이 마지막인것 처럼
나에게 키스해 줘,
나에게 많이 키스해 줘난
나중에 너를 잃을까 봐두려워
Quiero tenerte muy cerca,
Mirarme en tus ojos,
Verte junto a mi
Piensa que tal vez manana,
Yo ya estare lejos,
Muy lejos de aqui
널 정말 가까이서 가지고 싶어
너의 눈속에 있는 나를 보고 싶어,
나와 같이 있는 너를 보고싶어
난 내일 아침에는
이미 여기서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해
Besame, Besame mucho,
Como si fuera esta la noche,
La ultima vez
Besame, Besame mucho,
Que tengo miedo a perderte,
Perderte despues
나에게 키스해 줘,
나에게 많이 키스해 줘
마치 오늘 저녁이 마지막인것 처럼
나에게 키스해 줘,
나에게 많이 키스해 줘
난 나중에 너를 잃을까 봐 두려워
Besame Mucho (나에게 많이 키스해 줘요)
/Gigliola Cinquetti &Trio Los Panchos..♪
베사메무쵸♬현인/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
베사메무쵸야 리라꽃같은 귀여운 아가씨
베사메무쵸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마리아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배사메 무쵸.mp3 (선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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