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올드팝]Come On Over - Olivia Newton John

jubila 2019. 11. 17. 17:53

Come on Over - Olivia Newton John









Come on Over - Olivia Newton John

If my life gets like a jigsaw With the pieces out of place Come on over Put a smile back on my face And if all my bad days came at once You would know just what to do Come on over Baby, you would see me through And if you think I need you Come on over Bring your love around You can dry away my tears And if you think I need you Come on over Lay your body down You know I will be here So bring your love around When I cannot see in front of me And I know my darkest day Come on over You can take it all away And if you think I need you Come on over Bring your love around You can wipe away my tears And if you think I need you Come on over Lay your body down You know I will be here So bring your love around If you think If you think I need you Come on over














           Olivia Newton John

5곡의 넘버원 싱글과 22곡의 탑 40 히트곡을 배출한 팝의 여왕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은 '팝계의 신데렐라' 혹은 '팝계의 꾀꼬리'라는 애교스런 별명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치했다. 국내에서는 디스코와 팝록으로 전향한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컨트리 음악이었다.

1974년 올리비아 뉴튼 존이 컨트리 뮤직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을 때 컨트리 뮤직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불평의 소리가 드높았다. 사실 그런 사실이 그다지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에서 건너온, 영국계 팝 발라드, 록 보컬리스트가 갑자기 그와 같은 명성을 얻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녀의 미국시장 진출 후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컨트리 뮤직 옹호론자들에게서 버림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많은 수의 팬들이 그녀의 음반을 사주어 미국 내에서의 확실한 성공을 공인 받게 된다.

사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할말이 많았다. 미국의 컨트리 음악이 사실은 영국의 오래된 포크음악이었다는 사실과 18세기쯤 그녀의 아버지이 고향이기도한 웨일즈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서 뿌리내린 음악이기 때문이다. 포크 음악은 어린 올리비아 뉴튼 존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갖게된 음악으로 그녀가 호주에서 살고 있을 때 가장 위안이 되었던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1948년 9월 26일,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계 할아버지인 막스 본(Max Born)과 대학 학장인 아버지를 둔 '영국판 사대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곱게 자란 올리비아 뉴튼 존은 기숙사처럼 딱딱한 가풍(家風)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에 몰입했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아버지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오르몬드 대학으로 옮김에 따라, 195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성장했다. 어린시절부터 다재다능한 음악적 재능을 보인 올리비아는 15세 때부터 스쿨 밴드인 '솔 포'(The Slo Four)를 결성하기도 했고, 커피 하우스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십대 시절이 끝나갈 무렵부터 올리비아는 컨트리에서 차츰 팝음악 쪽으로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한다.

16세 때 호주에서의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그녀는 부상으로 한창 활성화되고 있던 60년대 말의 영국 팝 음악계를 견학할 기회를 갖는다. 영국에서 올리비아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팻 캐롤과 함께 '팻 & 올리비아'라는 듀오로, 이후 그룹 '투모로우'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클리프 리처드와 함께 영화 "Tomorrow"에 출연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백보컬리스트로 합류하면서 가닥을 잡아가던 금발의 뉴튼 존은 1971년에 밥 딜런(Bob Dylan)의 곡 "If not for you"로 데뷔하면서 팝 역사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이후 70년대 초 영국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젊은 팝 보컬리스트로 인정을 받는다. "If not for you"는 1971년 빌보드 팝 싱글 차트 25위까지 진입한 첫 솔로로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1973년 일본 동경 가요제에 출전했는데, 여기에서 유명한 작곡/프로듀서 폴 윌리엄스에게 발탁되어 그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영국에서의 성공은 곧 그녀에게 더 큰 음악시장인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하게 되고 얼마 후 미국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70년대 초 화려한 진출을 하게 된다. 1973년 MCA 레이블에서 나온 폴 윌리엄스가 작곡해준 그녀의 첫 싱글인 "Let Me Be There"은 팝과 컨트리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곡으로 그 해 말 컨트리 차트 10위안에 진입했고, 팝 싱글 차트에서도 6위를 차지하는 성공을 거둔다.

데뷔 초기 그녀가 취입한 곡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의 노래들을 커버한 것이 많았다. 브레드(Bread)의 "If", "Everything I own", 존 덴버(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What is life", 홀리스(Hollies)의 "The air that I breathe",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등, 그녀가 그래미 최우수 컨트리 여자 가수상을 수상한 "Let me be there"를 제외하면 초기 3장의 음반은 거의 컴필레이션의 성격이 짙은 앨범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기존에 많이 알려진 곡들로 신인 가수들의 입지를 빠르게 다지면서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하기 위한 스타 메이킹 공식이었다.

다음해인 1974년에는 그녀의 미국진출이 단지 미모덕을 본 요행이었다는 주위의 달갑지 않은 시선을 단번에 날려버릴 빅 히트곡인 "if You Love Me (Let Know)"를 컨트리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순식간에 골드 레코드를 기록한다. 그녀의 히트행진은 같은 해 가을에 나온 싱글 "I Honestly Love You"로 또 한번 입증되는데 이 곡은 팝 싱글차트 정상에 오르며 역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즈음 발표된 그녀의 미국시장 데뷔앨범은 컨트리 앨범차트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4년 'Country Music Association Award'에서 4개 부문('Entertainer Of The Year', 'Album Of The Year', 'Single Of The Year', 'Female Vocalist Of The Year')에 노미네이트된 올리비아의 활약상은 '올해의 최고'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데뷔년도를 맞게된다. 계속해서 올리비아 뉴튼 존은 70년대 컨트리 차트에서 맹위를 떨친다. 그러나 정통 컨트리 신봉자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선 이 미녀 가수가 미국인이 아니라 호주에서 성장한 영국인이었고, 둘째는 컨트리의 트레이드마크인 소위 '꺾기 창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잔의 맑은 정화수나 청명한 봄바람 그 자체다. 이 컨트리 창법 상의 약점(혹은 장점)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올리비아 뉴튼 존이 디스코나 팝 록으로의 방향 전환이 어렵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또한 "if You Love Me (Let Know)"로는 1975년 제17회 그래미의 팝 부문을 수상했다.

1975년 "Have You Never Been Mellow", "Please Mr. Please", "Something Better To Do"(앨범 [Have You Never Been Mellow]도 팝 앨범차트에서 정상에 오르는 좋은 성과를 거둔다) 등의 히트곡을 내며 승승장구했고, 1976년에 들어서도 컨트리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비지스의 베리와 로빈 깁이 작곡해 준 히트곡 "Come on Over"(76년 5월)와 탑 10 히트곡 "Don't Stop Believin"(76년 8월)으로 그녀의 앨범 [Clearly Love]와 [Come on Over]가 순조롭게 골드를 따게 된다. 1977년에도 앨범 [Making A Good Thing Better]가 탑텐을 기록하며 인기는 계속됐고 싱글차트에선 타이틀 트랙이 맹위를 떨치기도 했다.

1978년도에 와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영화 Grease에 존 트라볼타와 함께 출연하며 영화와 사운드트랙 앨범을 동시에 히트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녀가 영화에서 부른 "You Are The one That I Want"는 그녀가 지금까지 부르던 컨트리 스타일에서 많은 변화를 보인 로큰롤적인 성향이 강하게 풍긴 곡으로 그녀가 컨트리 음악에서 팝 음악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닌가 추측될 정도로 일대 변화를 꾀한 곡이었다. 그녀의 히트곡과 함께 사운드트랙은 순조롭게 골드를 기록했다. 존 트라볼타와 듀엣을 이룬 "Yor Are The one That I Want"는 1978년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또다른 주제곡으로 1978년 싱글 차트 3위와 5위를 차지한 "Hopelessly Devoted To You"와 "summer Nights" 등이 히트했다. 그러나 다음 솔로 앨범인 [Toally Hot]은 제목과 달리 여전히 그녀의 노래가 컨트리 스타일에서 크게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78년작 [Totally Hot]에선 "Dancin' Round And Round", "Borrowed Time"과 같은 곡들이 올리비아에 의해서 작곡되어 인기를 얻었다. 1980년에는 그녀가 두 번째로 참여한 뮤지컬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 [Xanadu]가 발표되는데, 여기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와 함께 "Magic"이란 곡을 빅히트시킨다. 이 곡은 1980년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게 된다. 또한 록 밴드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와 함께 한 영화의 동명 타이틀 곡 "Xanadu"는 동년 싱글 차트 8위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클리프 리처드와 듀엣을 이룬 "Suddenly"도 히트했다.

80년대에 등장한 그녀의 새로운 솔로 앨범은 1981년에 발표된 빅히트작 [Physical]이었다. 1981년 12월 18일 처음 등장한 그녀의 싱글이자 타이틀트랙인 "Physical"은 싱글 차트에서 무려 10주간 1위를 지켰고, 5번째이자 마지막 1위곡이 되었다. 결국 1982년 최고의 싱글에 주는 'Single Of The Year'로 뽑히는 영광을 거둔다. "Physical"은 지금까지 청순한 이미지의 올리비아를 단숨에 섹시 스타로 부각시켰다. 미국 일부지역에서는 금지가 되기도 한 이 곡의 음악 비디오에서 그녀는 숏 팬츠의 모습으로 뭇남성들을 유혹했다. 이 비디오는 팝계에 음악 비디오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그녀에게 그래미 최우수 비디오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Physical"은 음악 비디오로 대표되는 1980년대 팝 역사에 있어 그 변화를 가져온 출발점이 되었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앨범 홍보를 위해 많은 투어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투어에는 존 트라볼타와 같은 유명스타가 초대되기도 했다. 만일 그녀의 정력적인 라이브활동이 없었으면 올리비아의 성공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녀의 라이브는 활기에 넘치고 매력적이었다. 5년간 연속적으로 벌인 긴 투어의 마지막이었던 1982년 말에 올리비아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제 마음이 좀더 편해졌다. 언제나 스테이지 위에서는 긴장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더욱 새로워진 나의 모습들을 보여줄 수 있었고,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계속 성장해왔다."

호주 출신이라는 핸디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여자의 앞날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왼손잡이는 불길하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성공을 향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었고 야망이 있었다. 그 동안 부당한 방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성공의 안락함을 느끼고 있다. 결국 나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게 된 것이다."

1982년 투어 도중 올리비아 뉴튼 존은 'Olivia Newton John : Let's Get Physical'이라는 프로그램에 네 번 출연하여 건강함을 과시했고, 싱글 "Heart Attack", "Make A Move on Me"가 탑 10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얼마 후 발표된 베스트 앨범 [Olivia's Greatest Hits, Volume 2]는 1984년까지 차트에 머물러 멀티 플래티넘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즘음 존 트라볼타와 다시 영화 Two Of A Kind에 참여하는데 아쉽게도 영화는 실패했지만 사운드트랙은 프래티넘을 따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서는 "Twist Of Fate"가 탑 10 히트를 기록한다.

올리비아는 1984년 영화 Xanadu에서 만난 11살 연하의 배우 Matt Lattanzi와 결혼했고, 1986년에는 첫 딸 Chloe를 출산했다. 이로인해 활발한 음악활동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1986년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와 듀엣을 이룬 "The Best Of Me" 등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타이틀 트랙 "Soul kiss"가 20위에 랭크된 1985년도 앨범 [Soul Kiss]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가정과 사업에 몰두하던 올리비아는 유달리 동물에 대한 애정도 컸다. 그리고 딸의 출산과 함께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의 미래가 될 아이들을 위해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헌신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1990년 UN 환경대사로 공식 임명되기도 한 올리비아는 브라질의 아마존 방문으로 자연파괴의 위험성을 전세계에 알리고, 환경보전의 메시지를 담은 1994년 앨범 [Gaia]를 발표했으며, 여러 환경관련 방송 프로그램과 행사에 모습을 보이는 등 환경보전 운동에 앞장서는 민간대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후 1998년에 [Back with a Heart], 2000년에 [One Woman's Live Journey] 등의 앨범을 발표하였다.

1992년에는 유방암으로 개인적인 큰 시련을 맞이했으나 이를 극복한 인간승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1995년에 불행한 이혼으로 다시 한번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0년 8월, 시드니 올림픽 성화 주자로 참여하기 직전 내한 공연을 가져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 올리비아 뉴튼 존의 당시 나이는 52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송(老松)의 나이테만큼 많은 주름살이 그녀의 얼굴을 책임질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를 듣고 있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한 소녀'로 우리의 마음 속에 기억될 것이다.

자신의 수많은 히트곡들과 함께 아직도 그 고혹적인 목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올리비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음악과 더불어, 음악 만큼이나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대중들과 함께 나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