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orda (기억) - Milva
Ricorda (기억) Milva Ricorda amore mio, ricorda.. Se tu fra i sorrisi della gente cercherai un sorriso per te solo cercherai fra le mani un'altra mano ricorda io ti amo.E se più nessuno ti risponde e ti sei perduto nel silenzio griderò per il quanto sia lontano ricorda io ti amoE adesso va, io ti seguirò con gli occhi, fino a quando il mio pianto ti vestirà d'argentoMa se quando scenderà la sera sentirai le parole che volevi ed avrai chi ti prende per la mano dimantica amore mio dimentica che ti amoE adesso va, io ti seguirò con gli occhi,fino a quando il mio pianto ti vestirà d'argentoMa se quando scenderà la sera sentirai le parole che volevi ed avrai chi ti prende per la mano dimantica amore mio dimentica che ti amo che ti amo.. che ti amo 그리운 이여.. 생각해줘요. 만약 당신이 사람들의 미소 속에 당신만을 위한 미소를 찾는다면, 많은 손 중에서 또 한손을 찾는다면, 생각해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약 떨어져 있어도 나는 외치리니...생각해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그러면 지금 당장에라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내 눈물이... 당신을 은색으로 만들 때까지. 그러나 만약 밤의 장막이 내릴 때 당신이 고대하고 있던 말을 듣고, 그 손을 잡아 주는 누군가를 얻었다면, 그리운 이여, 잊어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
Milva [ 밀바(마리아 일바 비올카티)는 1939년 7월 17일 이태리 페라라의 고로에서 태어났다. 1959년 이태리 국영 방송국인 RAI에서 주최하는 신인발굴대회에 참가하였고 7,600명의 참가자 가운데 1위를 차지하였다. 이어 밀바는 에디뜨 삐아프의 유명곡들을 자신의 이태리어 버전으로 녹음한 'Milord(각하)' 앨범을 발표하였다. 1961년 밀바는 산레모 가요제에 'Il Mare nel Cassetto(서랍속의 바다)'로 3등상을 수상하였다. 밀바는 그해 이태리 레코드 비평가들로부터 '올해의 가수'로 선정되었다. 밀바는 영화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당대 유명배우였던 지나 롤로브리지다 와 엔리코 마리아 살레르모와 함께 '이포리타의 아름다움' 이란 영화로 데뷔하였다. 1963년은 이제까지 주로 이태리 곡들을 불러왔던 밀바에게 변화가 시작되는 해로 기록되는데, 영가(靈歌), 가스펠 그리고 저항가요등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당시 나온 음반 ‘Quaggiu in Filanda(여기 핀란다에서)’ 와 ‘John Brown(존 브라운)’은 대표적으로 사랑받은 곡이다. 1965년에 밀바는 '밀라노의 작은 극장'에 처음 서게된다. 그리고 'Exodus' (출애굽기), 'fischia il vento' (바람이 부네)' 'Addio Lugano Bella (안녕, 아름다운 루가노)'와 같은 곡이 수록된 앨범 'Songs of Freedom (자유의 노래)'을 녹음한다. 폴 팻이 밀바를 초대해 해방 20주년에 그녀의 곡들을 노래했고, 다시 밀바는 리사이틀 '그렇다면 이것이 위기인가?' 의 주인공인 게오르그 스트레러와 함께 작업하였다. 이 작업은 '밀라노의 작은 극장'의 이태리 투어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아울러 게오르그 스트레러가 감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와 노래'로 이른바 브레히트(Brecht)적인 쇼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1968년 밀바는 지안프란코 데 보시오의 '루잔테'에서 산문극으로도 데뷔했으며 이를 계기로 북구 유럽을 투어했다. 1969년에는 여배우로서로도 정점에 이르는데 지노 브라르니에리와 함께 출연한 가리네이와 지오바니니가 감독한 'Angels in Flag(깃속의 천사)'로 '실버 마스크'를 획득했다. 1972년 밀바는 그리피 패트론 제작의 영화 'Of love is died(사랑은 가고)에 실바나 망가나와 루크 메렌다와 출연하면서 영화계로 다시 발을 돌렸다. 베니스에서는 'The Philander(연애주의자)'라는 영화의 최고 판매고로 '곤돌라 도로'를 획득하기도 했다. 1972년 앨피로 발매된 'Milva signs Brecht(밀바 브레히트를 노래하다)'로 독일 비평가들이 수상하는 음반상을 수상했다. 밀바는 필리포 지그스 감독의 두 전쟁사이의 노래 Songs between the two wars의 삽입곡 Nulla Rimpiangero(Je ne Regrette rien)으로 베를린 페스티발에서 최고의 영애를 안았으며 이곡으로 이태리와 유럽전체를 오랫동안 투어했다. 1978년 밀바는 밀키스 테오도라키스와 음반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은 곧바로 독일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Les Enfants du Piree(Uno a te uno a me)' (피레의 아이들(하나는 너를 위해, 하나는 나를 위해)'라는 곡은 앨범의 백미로 꼽힌다. 1989년에 밀바는아스토르 피아졸라와 공연을 가졌으며, 결과물인 탱고 델라 겔로시아 와 탱고 델라 카피네레는 주요 유럽 페스티발의 무대에 올랐다. Et Maintenat(Che mi faro), Nulla Rimpiangero(Je ne Regrette rien)의 공연과 함께 빠리의 카지노 극장에서 협연했다. 일본에서의 최근의 공연, 에디뜨 삐아프 헌정 리사이틀등을 비롯해 아직까지도 놀랄만한 성공이 계속되고 있으며 레코딩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 프랑스의 대중음악 샹송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아마도 오래전 고인이 된 에디뜨 삐아프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대중음악인 칸소네를 들으면 곧바로 Milva(63)가 떠오를 만큼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 가요계 여왕의 자리를 떠나본 적이 없는 칸소네의 영원한 연인이다. 밀바 마리아 비올가티라는 본명을 가진 밀바는 59년 이탈리아 국영방송(RAI)이 주최한 오페라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으나 곧 칸소네 가수로 방향을 수정해 이탈리아 무대에 본격 등장한 이후,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밀바의 고향 이름을 딴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연극예술과 칸소네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열정적이고도 왕성한 활동으로 지속적 황금기를 구가하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노래할 수 없다'는 말로 노래에 대한 뜨거운 애착을 표현하는 밀바는 지난 1972년 내한공연 때 흔히들 외국의 인기가수들이 종종 한국의 청중들을 무시하던 태도와는 달리 깨끗하고도 공손한 무대매너와 최선을 다한 열창으로 한국팬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산레모 가요제는 세계 3대 가요제의 하나로 니콜라 디바리, 나다, 지아니 모란디, 질리오라 징켓티 등 무수한 스타들을 배출한 칸소네의 전통적 산실로 인정받고 있지만 밀바는 61년 '서랍속의 바다'라는 노래로 이 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한 이래 한 번도 빠짐 없이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해 모두 입상하는 경력으로도 더욱 유명하다. 한때 연극예술에 집착해 68년 주연한 뮤지컬 '깃발 속의 천사'는 로마에서 9개월이라는 장기공연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 화려한 연기생활 뒤에는 활동에 몰두하는 탓에서 비롯되는 남편과의 불화로 8년만에 파경을 맞는 불행도 함께 겪게 되지만, 이후 더욱 성숙한 목소리로 '칸소네계의 마리아 칼라스'로 인정받게 되었다. 80년에는 데미스 루소스가 리더로 있던 그룹 '아프로디테스 챠일드'의 키보드 주자 반젤리스와 함께 독일어로 발매한 음반의 성공으로 재능을 인정받는가 하면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에도 능통해 이탈리아보다 유럽에서 더욱 많은 판매고를 올리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구한 가톨릭 교회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빛나는 예술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나라. 지금도 이탈리아는 관광객들에게 조상이 후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실감케 해줄 정도로 국가 자체가 곧 예술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뿐더러 세기의 미술가 미켈 안젤로, 치마부에, 라파엘로, 오페라의 신화 카루소, 베르디나 파바로디 등을 비롯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술의 본고장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의 노래 속에서조차 이들의 예술적 영감이 스며있음을 느낀다는 이들도 많이 있다. 축제의 노래(Aria Di Festa), 비련(Nessuno Di Voi), 사랑은 먼 곳에서(Da Troppo Tempo), 미롤르(Millor)등 고전적 향수를 가득 담은 밀바의 수많은 노래들은 보통 30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무대의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져갔던 다른 이탈리아 여성가수들의 전례를 넘어서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오가며 오페라 무대는 물론, 칸소네 무대에서도 영원한 사랑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특히 밀바의 'Da Troppo Tempo'는 사랑을 기다리는 설레임과 그를 보내야 하는 여인의 쓸쓸함을 주제로 한 노래로 그녀의 진가는 물론 클래시컬한 칸소네의 매력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해주는 빛나는 명곡으로 오래 오래 기억되고 있다. 1939년 7월 18일 Goro(Fe)출생으로 세계적인 대형 가수이자 배우이다. 본명은 Maria Ilva Biolcati이며 1955년 Bologna로 이주하여 Emilia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야간 사교 클럽에 Sabrina라는 이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Rai에서 개최된 신인 Concorso에서 우승하여 첫 번째 명성을 얻었고 1960년 Pantera di Goro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음악 세계에 나서게 되었다. 1961년 Sanremo 가요제에 Debut하여 [Mare del cassetto]로 3위에 입상하였으며 같은 해에 ‘La bellezza di Ippolita’라는 영화에 처음 출연하였다. 1965년에는 Giorgio Strehler와 함께 극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Brechtiano의 작품에서 훌륭한 연출을 하였고 특히 독일에서 평가를 받았다. 많은 훌륭한 작품중에는 Milva canta Bertold Brecht(1965), Lo Bertold Brecht(1967-1968) L'opera da tre soldi e Canto di un mostro lusitano(1971) 등이 있다. 이후 1973년 Sanremo 가요제에서 [Da troppo tempo]로 3위에 입상한 바 있다. |
Adventurer 승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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