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관현악] 시벨리우스 /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

jubila 2022. 5. 30. 10:27

시벨리우스 /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




Sibelius Concerto for Violin in D minor, Op. 47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 Op. 47

Jean Sibelius 1865-1957

1 Allegro moderato,      2 Adagio di molto,     3. Allegro, ma non tanto

Sarah Chang playing the solo violin
Jaap van Zweden conducting the Radio Filharmonisch Orkest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로 명성을 누리던 시벨리우스가 1903년에 작곡한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 이 곡은 바이올린 협주곡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명곡으로 묘한 낭만성과 이국적인 분위기에 한참이나 넋을 잃고 빠져들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대형 교향곡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탄탄한 관현악 구조 위에서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가 발휘되는 견실한 구성에 있다.


얀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타바스테후스(Tavastehus)에서 12월 8일 태어났으며, 같은 해의 태생으로는 「마법사의 제자」(관현악곡)의 작곡가 뒤카스(프랑스)가 있다. 이 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오페라)가 초연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끝났다. 아버지는 핀란드인으로 군의(軍醫), 어머니는 스웨덴인의 피를 이어받은 여성이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친숙하여 10세 때 작곡을 시작했지만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다. 15세 때 군악대장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천분을 나타냈는데, 그 이후 음악 이론을 거의 독학으로 배우면서 작곡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양친은 음악가로서 입신하는 것을 원치 않아 1885년(20세) 헬싱키 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본격적인 음악 수업 개시
대학 입학과 동시에 헬싱키 음악원의 베겔리우스(Martin Wegelius, 1846~1906)에게 본격적인 작곡법을 배우게 된다. 얼마 후 대학을 중퇴, 음악원에 적(籍)을 두고 작곡 외에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 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는 부소니(Ferruccio Busoni, 1866~1924)로서, 이래 두 사람의 친교는 부소니의 죽음까지 계속되었다. 1889년(24세)에 음악원을 졸업, 장학금을 받고 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유럽 유학
먼저 베를린에 가서 베커(A. Becker)에게 대위법을 배웠는데, R.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의 「돈환」과 그 밖의 신음악에 계발된 것도 이 시기였다. 이어 빈에 가서 골트마르크(K. Goldmark), R. 푹스(R. Fuchs)를 사사했으며 뿐만 아니라 동시에 브람스(독일) 등의 음악가와 교제할 수도 있었다. 가곡을 비롯해서 이 시기까지의 그의 작품은 아직 독자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대작 교향시 「쿨레르보」의 스케치는 이미 개시되고 있었다.

헬싱키 음악원 교수
1892년(27세) 귀국하자 곧 모교의 작곡·바이올린 교수로 취임, 이전부터 약혼중이던 예르네펠트 대장의 딸 아노이(Anoi : 작곡가 예르네펠트의 누나)와 결혼 생활에 들어갔다. 이 해에는 민족적 대서사시인 『칼레발라 Kaleval‎a』에 의한 교향시 「쿨레르보」를 완성하고 초연되어 널리 인정을 받는다. 이어 교향시 「엔 사가」(1901개작)와 모음곡 「카렐리아」(관현악곡)(1893)가 완성되고 발표되어 왕성한 창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오늘날도 흔히 연주되는 4개의 「전설곡」(1895), 교향시 「핀란디아」(관현악곡)(1899) 등의 명작은 민족적 작곡가로서의 시벨리우스(핀란드)의 지위를 결정적인 것으로 했다. 1897년 국회는 그에게 연금 2,000마르크를 주기로 의결했는데, 이 기회에 약 5년간의 교수 생활을 그만두고 자유로운 활동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파리 만국 박람회
1900년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어 초청받은 시벨리우스(핀란드)는 지휘자 카야누스(Robert Kajanus, 1856~1933)와 함께 관현악단을 이끌고 도불해 파리를 비롯하여 스톡홀름, 오슬로, 코펜하겐, 함부르크, 베를린, 암스테르담, 헤이그, 브뤼셀 등등 각지를 방문하면서 자작을 지휘했다. 이미 1899년에 「교향곡 제1번」을 완성한 바 있는 그는 만국 박람회의 이듬해인 1902년(37세)에 역작 「교향곡 제2번」을 완성하면서 드디어 독자의 작풍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약 4년간 귀를 앓았으며, 1904년(39세) 헬싱키 교외로 집을 옮기고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조용한 창작 생활을 하게 된다. 작풍에도 내성적인 경향이 나타났는데, 1909년(44세)의 현악 4중주곡 「친애하는 목소리」(실내악곡)나 1911년(46세)의 「교향곡 제4번」이 이러한 면을 정립해 갔다. 다만, 유럽과 미국의 연주 여행은 이 동안에도 자주 행해지면서 세계적인 대작곡가로서 인정되어 갔다.

독자의 양식 완성으로
1915년, 50세의 생일은 전국적으로 축하되고 연금은 50,000마르크로 증액되었다. 「교향곡 제5번」도 일차적으로 완성되어 탄생 축하 음악회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명작 「교향곡 제4번」 이후, 전통적인 유럽의 양식을 떠나 독자적인 양식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었던 그는 이 곡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대폭적인 수정이 가해지고 있는 동안에 다음 교향곡 「제6번」과 「제7번」의 구상이 진행되어 갔다. 1917년(52세) 10월 혁명의 결과 제정 러시아는 무너지고 핀란드는 오랫동안의 압정에서 벗어나 공화국 독립을 선언했다. 이 동안 세상의 정세는 불안정해서 시벨리우스(핀란드)도 창작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안정된 생활의 회복과 함께 또다시 창작은 진행되어 1923년(57세) 교향곡 「제6번」, 1924년 「제7번」이 잇따라 완성되었다. 어느 것이나 명작이기는 하지만 특히 「제7번」은 시벨리우스(핀란드)만의 형식에 모든 표현의 가능성을 담아넣은 최고의 걸작으로 치고 있다. 이듬해 1925년 60세의 생일을 기념하여 연금은 10,000마르크로 증액되고 대통령으로부터는 훈장을 받았으며, 국민의 각 계층으로부터 탄생을 축복해서 27,000마르크의 돈이 모아졌다고 한다.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이만큼 경애와 지지를 받은 음악가는 드물 것이다. 70세 생일에도, 80세 생일에도 국가적인 축제가 열렸으며, 1957년 92세의 장수를 누린 이 금세기 초엽 최대의 교향곡 작가는 영광과 명성에 장식된 행복한 일생을 헬싱키에서 마쳤다. 9월 20일의 일이다.
현대의 민족적 낭만주의
20세기의 음악에 속하면서도 시벨리우스(핀란드)의 작품은 이른바 현대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준다. 핀란드의 민족성과 풍토성에 깊이 뿌리박은 그의 음악은 오히려 후기 낭만파의 음악을 이어받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민족주의의 음악은 낭만파 음악의 중요한 지류의 하나였지만, 시벨리우스(핀란드)는 이 민족성 낭만주의에 극히 독특한 구성 원리를 주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그러나 교향곡 「제7번」에서 최고의 결정을 나타낸 이 구성 원리를 개척함에 있어 그는 완고하리만큼 주위의 영향을 계속 거부했다. 인상주의 이후의 어수선한 유럽 음악계의 움직임에 대해 그만큼 무관심할 수 있었던 음악가는 드물다. 시벨리우스(핀란드)의 음악이 지닌 유례 없는 내면성은 이러한 창작 태도에도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 결과 그의 음악 어법은 뜻밖에 현대인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고, 자칫하면 간과되기 쉬운 현대 음악의, 하나의 바람직한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두 개의 버전과 두 번의 초연
시벨리우스가 1902년부터 계획해 온 바이올린 협주곡의 첫 번째 버전을 완성한 것은 1904년 초였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버미스터(Willy Burmester, 1869~1933)의 독주로 베를린에서 초연을 하고자 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1904년 2월 노바첵의 협연으로 헬싱키에서 초연하였다. 당시 알코올중독으로 건강상의 문제를 갖고 있었던 시벨리우스는 이 곡을 초연 직전에야 겨우 완성하였고, 협연자는 이 협주곡의 유례없는 난해함을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지 못하면서 초연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시벨리우스는 첫 번째 버전의 출판을 유보하고 개작을 시작하여, 다음해인 1905년 새로운 버전으로 완성된 협주곡을 발표했다. 두 번째 버전의 초연은 1905년 10월 할리르(Carl Halir, 1859~1909)의 독주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휘로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첫 번째와 달리 성공을 거둠으로써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정복을 꿈꾸는, 비르투오소 대작
시벨리우스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악기를 위한 작품을 쓴다는 이점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기교적인 문제에 관해서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조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하겠다. 때문에 이 협주곡에는 시벨리우스의 실험 정신과 상상력을 거침없이 표출해내며 바이올린의 기교를 다양하게 망라하였다. 독주 바이올린의 기교적인 부각과 더불어, 시벨리우스 특유의 빼어난 선율 진행 또한 이 협주곡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핀란드의 자연경관을 연상시키는 듯 차갑고 투명하면서도 북유럽의 백야와 같이 음울한 느낌의 선율은, 때때로 등장하는 타오르듯 밝게 빛나는 정열적인 선율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또한, 교향악적 색채를 부여한 오케스트라와 독주 바이올린의 균형 잡힌 협동은 작품의 드라마틱한 특징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수작으로 평가 받는 이 협주곡은 난해한 만큼이나 호평을 받는 연주를 해 내기가 힘든 작품이다. 때문에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이라면 누구나 도전하고 정복해 내고 싶은 대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Sibelius Concerto for Violin in D minor, Op. 47

Violin : Hilary Hahn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


 

1 Allegro moderato,      
풍부한 선율과 더불어 독주 바이올린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악장이다. 연주시간이 약 12분으로 작품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3개의 악장 중 음악적 내용 또한 가장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 악장 전체의 구조에서 교향악적 특징을 취하면서, 악장의 시작 부분에서는 독주 바이올린의 광시곡적인 특징을 환상적으로 표출해 내고, 악장의 중간 부분에서는 발전부 부분을 독주 바이올린의 카덴차로 대변함으로써 종래의 협주곡들과는 차별화되는 혁신적인 작품으로서 강렬히 어필한다.

 

 

2 Adagio di molto,    
느린 템포의 서정적인 악장이다. 우아하고 시적인 독주 바이올린 선율이 끈기 있게 지속되며, 오케스트라에서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과 긴장감을 차분하게 제압한다. 시종일관 저음역으로 연주되는 독주 바이올린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소리를 전달하는 듯한 표현력을 갖는다.

 

 

3. Allegro, ma non tanto
고난도의 바이올린 기교를 엿볼 수 있는 가장 비르투오소적인 악장으로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최고의 협주곡 악장 중 하나로 유명을 떨치는 악장이다. 격정적이며 민속적인 색채가 넘쳐흐르는 춤곡으로, 음악평론가 토베이는 이 악장을 ‘북극곰들을 위한 폴로네이즈’라 표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