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연주곡] Sous Le Ciel De Paris - Paul Mauriat

jubila 2022. 6. 8. 12:59

Sous Le Ciel De Paris - Paul Mauriat












Sous Le Ciel De Paris



Paul Mauriat














 

 





 

 







Paul Mauriat (1925~2006) ,
경음악의 연인, 멜로디의 使節 (1925~2006)


'폴 모리아 사운드'의 인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철두철미 경쾌하다. 어느쪽이냐 하면 우아한 파리의 향기를 전해 주는 프랑크 푸르셀이나 레이몽 르페브르의 격조 높은 이미지에 비하여 아주 대조적 이다.


예를 들면 그의 오케스트라는 언제나 그 유명한 현악군을 주축으로 하면서 뛰어난 터치의 피아노와 쳄발로 ·각종 관악기 등을 합한 다음, 여기에 밝고 박력 있는 로크 비트를 가미한다. 어떠한 곡이라도 일단 그의 편곡을 거치면 본래와는 전혀 다른 경쾌한 리듬과 생동감으로 넘치는 특유의 폴 모리아 사운드로 변한다. 이처럼 그의 연주를 들어 보면, 같은 곡이라도 다른 사람이 편곡한 것이나 원곡에 비해서 월등히 색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을 알수 있다. 좀더 세밀히 분석해 보면, 폴 모리아의 음악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극히 대범한 화음 진행으로 엮어진다. 또 그 리듬은 틀에 박힌 듯한 8박자 eight beat 패턴으로 일관한다. 그러면서도 선율의 아름다움을 십분 살리면서 뛰어난 터치의 쳄발로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교묘히 구사함으로써 각 악기가 갖는 고유의 음색을 요소요소에서 빛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그 컬러풀한 음향,특히 리듬에 대해 생각하는 그의 방법과 표현은 독창적인 데가 있다. 요즘의 유행만 쫓는 음의 풍토 속에서 간결하면서도 산뜻하고 아름다운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시적이기조차 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시적인 아름다움은 곧 간결의 미인데, 여기에 담겨져 있는 응집된 정감미는 참으로 값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감각에 점화(點化)되는 고도의 연주 형태와 테크닉은 그 출발부터 레코드의 기능을 백 퍼센트 계산에 넣은 녹음기술의 발달이 낳은 결과이긴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가 프랑스인임으로 해서 그의 혈관을 흐르는 프랑스적인 감성이 음악에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적절한 설명인 것 같다. 프랑스인이 갖고 있는 모든 문화적 특성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인생을 심각하게 보기보다는 오히려 여유있게 즐기려 들고, 항시 자유분방하면서도 날카로운 해학과 높은 안목을 지닌 프랑스적인 에스프리, 이것이 폴 모리아 사운드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한 곡 한 곡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보여 주는 선곡의 뛰어남과 높은 심미안을 들 수 있겠다. 그는 그때 그때 유행되는 히트송을 연구하고 최근의 영화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음악적인 가치가 있으며 일반에게 애호될 수 있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쉬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레퍼터리가 세계 각국의 민요에서 라틴 음악, 클라식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모든 음악을 망라한다는 데서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특히 폴 모리아는 구석구석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인데다 믹싱 기술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마음에 드는 기술자까지 쓸 수 있는 터라 그 자신은 오로지 음 만들기에만 전념한다. 기획 면에서 검토되고, 이어 곡이 선택되어 충분한 편곡 과정을 거친 결과, 내용에 어울리는 음악가를 모아 가장 훌륭한 상태의 연주가 레코드화한 것이 세계의 팬들에게 소개된다.

어떤 의미에서 폴 모리아는 프랑스적인 전아(典雅)함과 활력이 감싸고 있는 프렌치 팝스를 창조한 음악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형식이나 정신에 너무나 선명하게 그의 강한 개성이 나타나 있어서, 폴 모리아 이전에도 프랑스에 무드 오케스트라들이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1925년 3월 4일,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항도 마르세이유의 상트가 151번지에 있는 구항에 가까운 아파트에서 4형제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구항 부근은 마르세이유의 번화가이다. 시장이 있고, 구항의 부두에서는 생선을 파는 아침장이 서는, 인정미 넘치는 구역이기도 하다.

폴 모리아의 부친은 우체국에 근무했는데 전보 배달부였다. 집안 살림은 결코 유복한 편이 못 되었지만, 부친이 음악을 매우 좋아했고 피아노도 잘했다. 폴 모리아가 부친에게서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은 4세 때였다. 5세가 되자 폴은 한 번 들은 곡은 모조리 연주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꼬마는 날마다 1,2시간씩 하는 음악공부가 무척 즐거웠다. 그것은 아버지의 음악교육 방법이 훌륭했던 까닭과 음악의 즐거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그의 감수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은 10세 때부터 16세 때까지 마르세이유에 있는 음악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즐겁게 지낸 마르세이유 음악원 재학시절부터 폴 모리아는 졸업 후에 직업 음악가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가 되어 직업 음악가로서 독립을 하고 싶던 폴 모리아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음악에는 이해가 깊은 아버지였지만 직업인으로서 가는 길의 어려움을 알고 있던 까닭도 있었고, 유럽에 전운이 무겁게 뒤덮고 있던 것도 그 이유 중 큰 이유 였다.

결국 자기의 뜻과는 달리 폴 모리아는 아버지와 같이 마르세이유 중앙 우체국에서 전신 업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욕구 불만은, 밤에 동료들과 함께 그룹을 만들어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클럽에서 재즈를 연주하는 것으로 해소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을 계기로 삼아 그는 직업 음악가로 향한 길을 개척해 나갔다. 1950년경까지 폴 모리아는 니스 ·칸느 ·파리 등 국내를 비롯해서 벨기에 · 이탈리아 · 네델란드 · 이집트 등지의 클럽을 순회하였다. 이때가 바로 폴 모리아의 수련시대인 것이다. 그의 부인을 만난 것도 이무렵이였다.

알제리아에서 교직에 종사하고 있던 이레느 부인은 여름휴가로 고국에 돌아와 있었다. 남불 페르피냥의 카지노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폴 모리아는 공연장에 들어서는 그녀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한 것이다. 이레느 부인과의 연애는 폴 모리아의 눈을 파리로 돌리게 했다. 1950년에 폴 모리아는 파리로 올라왔다. 모든 예술가들이 꿈꾸는 음악의 도시이다. 그러나 파리에는 지중해의 태양도 없었고, 있는 것은 오직 잿빛 하늘뿐이었다. 바로 그무렵에 이 도시의 어딘가에 프랑크 푸르셀도 와 있었다. 때마침 프랑크 푸르셀은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하고 있었다. 1951년, 폴 모리아는 푸르셀 악단에 참가한 것이다. 같은 마르세이유에서, 그것도 엎어지면 코 닿을 데서 태어난 두 음악가는 먼 이역 파리 한구석에서 처음 상면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놀랐고 또 형언할 수 없는 친숙감에 젖었는지 상상키는 어렵지 않다.

폴 모리아를 단원으로 맞은 푸르셀 악단의 주 무대는 앙갱의 카지노였다. 그곳은 파리 북쪽, 자동차로 20분쯤의 거리에 있으며 호텔 ·극장 ·레스토랑 등 오락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리아에게는 아무래도 걸맞지 않는 무대였다. 마르세이유의 바닷바람과 태양이 무작정 그리웠다. 참다 못한 그는 결국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고향에 내려온 폴 모리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레느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결혼은 폴 모리아에게는 전기가 되었다. 그 시대의 마르세이유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동경의 대무대였던 레아르로부터 '오케스트라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날아들어 온 것이다.

이 레아르에서의 6년간이 오늘날의 폴 모리아를 길러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페셔널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것 이다.

이레느 부인과의 결혼 생활, 레아르에서의 직업 음악가로서의 활동 등이 잘 이루어져 갔다. 거기에 직업 음악가로서의 자신감이 또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53년에는 불과 20세의 미셀 르그랑이 여성가수 카트리느 소바지의 반주를 맡아 샹송 '파리 카나이유 Paris canaille' 등으로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명 편곡가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56년에는 프랑크 푸르셀 그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온리 유 Only you'가 대 베스트 셀러가 됨으로써 무드 음악은 크게 클로즈 업되었다 같은 해에 레이몽 르페브르는 달리다의 히트곡 '밤비노 Bambino'의 편곡과 반주 지휘를 맡아 일약 각광을 받았다. 1959년에는 카라벨리(클로드 바졸리)가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카라벨리와 캐스케이딩 스트링스'로서 출발했다. 아무리 살기 편하다고 해도 마르세이유에 죽치고 있는 한, 결국은 우물 안의 개구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폴 모리아의 나이 33세, 또다시 파리를 향한 야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9년, 폴 모리아는 다시 파리로 갔다. 다행히 남프랑스에서의 그의 명성은 조금은 파리에까지 미쳤으므로 그 재능을 인정하고 교섭을 해온 사람이 있었는데, 유명한 바클레 레코드 회사 사장 에디 바클레가 그 사람이다. 바클레는 오늘의 프랑스 쇼 비지니스계를 주름잡는 실력자요, 또 그 자신 뛰어난 음악가로 작곡도 하고 악단 지휘자로서도 이름이 있다. 그의 눈에 든다는 것은 곧 성공의 패스포트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에디 바클레의 뒷받침으로 폴 모리아는 바클레 레코드에서 편곡과 지휘를 맡았다 그러는 동안 뤼시멘느 드뤼르, 글로리아 랏소, 다니엘 다류, 앙리 살바도르 등과 같은 유명한 샹송 가수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그의 실력을 한층 높이 평가한 사람은 샤를 아즈나부르였다. 샤를 아즈나부르는 그 당시에 이미 인기 절정에 있었는데, 폴 모리아가 그를 위해 편곡한 작품이 무려 130여 곡이 넘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두 사람의 깊은 관계를 짐작할 수가 있다. '라 마마 La mamma' '라 보엠 La Boheme' '이자벨Isabelle' 등 아즈나부르의 히트곡은 모두가 폴 모리아의 편곡과 반주에 의한 녹음들이다.

1965년 바클레 레코드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만을 레코딩하자는 계약을 이번에는 필립스사와 체결했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현재와 같은 그 자신의 그랜드 오케스트라를 편성할 수 있었다.

폴 모리아가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던 1965년 전후의 시기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의 출현으로 전세계가 이른바 로크 시대를 맞이하던 때였다.

LP와 스테레오의 개발과 함께 녹음재생의 음역이 확대되고 경음악 연주의 형태나 테크닉이 차츰 다양해짐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운동이 전개되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에 대한 필립스 레코드의 요구는, 만토바니나 프랭크 책스필드 오케스트라 같은 기성악단의 타성화된 연주에 매너리즘을 느낀 대중기호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폴 모리아의 반응은 곧 나왔다. 그때까지는 생각지 않았던 4분의 8박자의 도입, 피아노와 쳄발로의 이중주에 의한 새로운 사운드의 창조, 매 곡마다 솔로 악기를 바꾸면서 곡의 주제를 스트링으로 옮겨 효과적으로 악센트를 불이는 수법, 즉 오늘의 그의 연주원리를 이루는 것들이다. 마침내 플 모리아 오케스트라에 의한 쳄발로와 스트링의 편중은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음향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 모리아의 진가가 일반에게 널리 인식되기 위해서는 1967년 녹음된 '사랑은 푸른 빛 Love is blue'의 히트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론 프랑스 본국에서는 그 후로도 줄곧 레코딩이 계속되는 한편, 1966년에 이르러 작곡가로서의 폴 모리아의 이름이 크게 클로즈 업 되기에 이른다.

그가 작곡하고 미레이유 마티유가 노래하면서 데뷔한 '사랑의 신조 Mon credo'가 크게 히트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동안 폴 모리아와 미레이유 마티유는 함께 일했다. 많은 곡을 편곡해 주었고, 그녀를 위해 몇 곡의 노래도 작곡했다. 그는 이렇게 미레이유 마터유를 됫받쳐 주는 한편, 편곡자 겸 악단 지휘자로서 끊임없이 활약을 계속하여 대략 1년에 2매 정도 레코드를 내놓았다. 그리고 1967년에 필립스에서 낸 다섯번째 LP레코드 속에 든 것이 바로 '사랑은 푸른빛'이었다.

1968년 초에 실로 경이적인 이변이 일어났다. 폴 모리아 그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사랑은 푸른빛'이 미국의 히트 퍼레이드에 선을 보이자 눈깜짝할 사이에 차트에 뛰어 올라서, 2대 미국의 음악잡지 빌보드와 캐쉬 박스의 랭킹에서 공동 제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중 빌보드에서는 2월 10일호부터 3월 9일호까지 연속 5주간 톱을 차지했고, 한꺼번에 100만 장 이상의 레코드가 팔려나가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이 연주곡의 히트를 기폭제로 프렌치 팝스가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프랑스적인 엘리간스 넘치는 달콤한 향기를 뿌리며 경쾌하게 다가서는 이름 없는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열광한다는 것은, 유럽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콤플렉스에 젖어 있던 재즈 취향의 미국인들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센세이셔널한 체험이었다고나 할까.

마치 청명한 초가을의 푸른 하늘에 견줄 만한 상쾌함을 뿜어내는 스트링과 쳄발로의 가벼운 비트가 가미된 명곡 '사랑은 푸른 빛'의 히트는, 이후 그의 음악이 편력하는 곳마다 깊이 뿌리를 내려 프렌치 팝스의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가 발표한 앨범은 이미 100만 장이 넘었고, 전세계의 곳곳에서 무려 2,500만 장 이상 팔려나가, 이 분야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는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무드 오케스트라 가운데서도 가장 세계적인 팬의 판도를 확보하고 있는 경음악의 상징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성공에는 마치 바이올린의 음색처럼 센시블하기 이를 데 없고, 세련된 파리풍의 전형적인 로맨스 그레이 폴 모리아의 구김살 없는 인간미와 밝음이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이지 리스닝 음악의 세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의 오케스트라들도 최근에는 젊은 연주자들의 출현으로 인해 그 지위가 약간은 동요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프랭크 밀스나 프랑스의 리차드 클레이더만, 루마니아의 팬 플루트 연주가 조르지 잠피르 등 신선한 감각의 젊은 연주자들의 진출은 지금까지의 이지 리스닝 음악계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줄 만큼 눈부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의 존재는 여전히 제왕적이다.

뭐라고 해도 그가 지금까지의 형체를 구축하는 데는 수많은 인내와 노력의 세월이 소모되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