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고향의 봄 (Spring in My Home town) 이원수 시, 홍난파 곡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있는 홍난파 생가 |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43세의 짧은 생애를 산 당시의 한국 음악인으로서는 대단히 다양한 예술활동을 벌였다. 그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홍준(洪준)과 부인 이씨 사이에서 난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 양금, 퉁소 등을 연주했다. 난파는 그 중 양금을 연주했다.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다. 1910년 9월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중학부에 입학했고, 이 곳에서 김인식을 만나 바이올린에 접하게 된다. 1916년에는 조선정악정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명되어 2년간 근무한다. 한편으로 그는 중앙예배당 안의 영신학교 교실에 음악 강습소를 차려 악리, 음계 연습, 유행 창가 교습을 지도했다. 그는 이런 교육에 필요한 『통속창가집』 (초판 1916. 10. 20)과 『악전대요』(같은 해 4. 10)를 출판한다. 당시의 음악활동으로는 1914년에 김인식이 세운 <경성찬양회 designtimesp=24431>의 음악회에서 활약하였다. 1917년에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형 홍석후와 함께 새문안교회의 집사로 임명 받는다. 그는 새문안교회와 안동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정확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1924년경에 찍은 새문안 교회 성가대 사진에 그가 찍힌 것이 보인다. 그 다음 해에 그는 2년 과정의 일본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다(1918-19). 그는 동경 YMCA를 중심으로 일어난 2.8운동(3·1 운동에 앞서간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세계 문학 작품들을 읽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1919년 그는 잡지 「三光」창간호 출판하였으나, 이는 4호를 내고 폐간된다. 1920년 동경음악학교 본과 진학을 거절당해 다시 귀국했고, 미국 유학을 계획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1년 그는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제1창작집 「처녀혼」을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같은 해에 오늘날 『쿠오 바디스』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어데로 가나(센쿠위츠 작)를 번역하였고, 잡지 「음악과 문학」을 창간한다(황석우와 공동 편집). 1922년에는 일종의 음악학원인 연악회를 창설했고 한편으로 독일 비자를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트루게네프 『첫사랑』을 번역하여 출판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 『최후의 악수』, 『虛榮』을 출판한다. 1923년 그는 한편으로 음악활동을 하면서 계속적으로 번역서와 창작집을 출판한다: 『매국노의 자』(스델만 작), 제2창작집 『向日草』, 『청춘의 사랑』(홍난파 저), 『靑年立志論』(스마일스 저), 제3창작집 『폭풍우 지난 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가 20-23년에 문학에 더 기울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4년을 기점으로 음악 쪽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 해에 그는 연악회를 중심으로하는 음악활동에도 열심이었고, 음악회 평론도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설을 번역하는 일도 계속했다: 에밀 졸라의 『나나』. 1925년 역시 연악회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활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생의 세 번째 잡지 「음악계」를 창간한다. 이 잡지 역시 4호를 끝으로 폐간된다. 그리고 그가 손수 골필로 악보를 그린 『세계명작합창가집』(등사본)을 출판한다. 1926년에 거행된 연악회 주최 "그랜드 콘서트"(YMCA 강당)는 이제 제법 그럴듯한 음악가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성악의 김형준, 피아니스트 김원복, 박경호, 박인덕, 첼리스트 백명곤의 이름이 보인다. 5월에 그는 아내를 잃는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에 입학하는 한편, 서울에서 다시 와서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를 만들고, 『세계의 악성』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1928년 그는 동경에 있는 신교향악단(新交響樂團)의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했고, 그 다음 해인 1929년에는 동경고등음악원 본과를 졸업한다. 그 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연악회를 부활시키고 째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해 9월에는 홍성유, 김원복과 함께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교수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 해에는 보육학교의 교육을 고려하여 『조선동요백곡집』(상편-25곡, 손수 그린 등사본, 1930년에는 인쇄본 나옴) 출판한다. 또한 『세계명작가곡선집』(등사본, 인쇄본은 1931년에 나옴)도 손수 악보를 그려서 출판한다. 1930년 그는 기존에 같이 음악활동하던 사람들 외에도 안익태,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원복, 김영의, 독고선, 홍재유, 황재경 등과도 함께 연주활동을 한다. 1931년에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를 하여 그의 이름이 많이 알려진다. 이 해에는 『조선동요백곡집』(하편 손수 그린 등사본, 인쇄본은 1933년에 나옴)과 작품집으로 바이올린 독주곡 『로만스』, 『애수의 조선』, 『동양풍무곡』, 『夏夜의 星群』이 출판된다. 이 해 7월 30일 그는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는 9월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입학하여 바이올린과 작곡 이론을 배운다(바이올린 교수: Marinus Paulsen, 작곡이론 교수: W. Keller). 그의 미국 생활은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그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하여 수차에 걸친 분납을 해야 했다. 그는 잘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도 많이 하여 건강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가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친 일도 있었다. 1932년 5월 27일 그는 일년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그리고 1933년 1월에 귀국한다. 한국에 돌아와 그는 소속되어 있던 중앙보육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경성보육학교의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귀국 독주회를 개최하고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을 출판한다. 그러니까 그의 "가곡"은 "가요"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난파 트리오」를 조직하여 진고개(충무로)에 있던 「明治製菓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난파트리오는 1936년 해체됨). 그리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그는 음반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과 잡지에 음악에 관한 글들을 끊임없이 발표한다. 음반회사와 관계하면서 그는 영화음악이나 신민요 그리고 가요에도 관여하였다. 이런 부분과 관련될 경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고 적었다. 1936년에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코리아음악연구소」창설하여 성악·바이올린·피아노·악리과 설치하여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고 『특선가요곡집』을 출판하였다. 1937년 그는 빅타 축음기회사와 경성보육학교를 거의 동시에 사임하고 석달후 경성 중앙방송국 양악 책임자 겸 방송관현악단 지휘자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흥렬, 김태연(金泰淵)과 함게 「성서(城西) 트리오」를 조직한다. 1937년 이후 일제의 성격은 더욱 흉포화한다. 이 해에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종하는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는 그는 총독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에 서고 만다. 1938년에는 수필집 『음악만필』(音樂漫筆) 출판을 출판한다. 그리고 1939년에는 JODK(경성방송국) 제2방송을 통해 모차르트의 주피터 심포니를 연주하여 방송한다. 1940년대에는 모든 것이 전쟁에 맞추어 생각되었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그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일제를 위한 대동아 전쟁의 선전원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다음해인 1941년에 세상을 뜬다.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한 음악가에 부여된 명성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음악에 서려있는 "애수"를 사람들은 즐겨 "민족의 애수"로 받아들였다. 이런 면은 홍난파의 발언으로 뒷받침되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물론 그가 총독부의 일을 즐겨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가 총독부 일을 부담스러워했다는 친지의 증언은 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지울 수 없는 친일의 글을 남기고 있다. 그를 위해 애석한 일이다. 홍난파의 일생은 식민지 시기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 시기가 끝나면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그는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요"와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통해 해방 직후의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봉선화』와 『고향의 봄』과 같은 노래는 이미 그 이전부터 민요보다 더 광범위하게 불리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서 보는 그의 독과점적인 위치는그를 거의 한국의 대표 음악가처럼 알려지게 한다. 이는 교과서에 실리는 일제시기에 창작된 문학 작품들의 경우도 홍난파와 유사한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문학에서는 홍난파와 같은 독과점 상태를 성취한 경우는 없었다. 그 이전의 음악가로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등의 음악가가 있었으나 그와는 전혀 비교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보다 조금 늦은 현제명, 박경호, 박태준 역시 그의 음악에 비해 질적으로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경우였다. 홍난파는 몇 편의 기악곡을 남겼다고는 하나 그 곡들은 본격적으로 기악적인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 것들이다 즉 홍난파의 기악곡들은 "노래"의 상태를 겨우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음악적 성취는 성악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와 이제 막 익힌 서양식 음악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결합시킨 것은 홍난파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기존의 한국 노래(민요)들이 장단의 틀 속에 선율을 집어넣어 그 속에서 선율이 밀리기도 당기기도 하는 반면에, 그의 노래는 가사의 음절 수에 따라 같은 리듬이 자꾸 반복되는 모습을 갖는다. 처음예를 들어 『봉선화』는 처음 네 음(또는 네 음절)의 리듬이 12번 반복되면서 한 곡을 이룬다. 물론 그의 모든 노래가 정확히 똑같은 모습을 보이지 안고 약간 변하는 경우도 많다. 그대로든지 변하든지 간에 이런 반복적 리듬의 경향은 그의 음악에소 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는 찬송가의 리듬 구성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선율 면에서 찬송가와 비슷한 음악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일반인이 부를 있는 한 옥타브를 약간 벗어나는 음역의 선율만을 사용한다. 즉 그의 노래는 리듬적으로 선율적으로 대단히 쉽게 배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못갖춘 마디의 음악을 많이 썼는데, 이상하게 들리는 일이 없었다. 이런 경우 아직도 어색하게 한국어와 결합시키는 작곡가들이 많다. 후에 윤이상이 그의 동요들이 "주옥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홍난파는 자신의 음악으로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적 능력에 대해서도 스스로 회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낸 사람이었고, 당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 작곡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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