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교향곡] 드보르작 - 교향곡 제3번

jubila 2023. 6. 15. 06:32

드보르작 - 교향곡 제3번

 

Dvorak Symphony No.3 in Eb major, Op.10

드보르작 교향곡 제3번 내림마장조

Dvorak, Antonin Leopold 1841~1904
1. Allegro moderato,    2.  Adagio molto, tempo di marcia,   3. Finale. Allegro vivace

Berliner Philharmoniker
Rafael Kubelik: Conductor




드보르자크의 교향곡3번인 이 곡은 1873년 4월부터 7월에 걸쳐 작곡되었으며 초연은 1874년 3월 29일 프라하에서 스메타나의 지휘로 프라하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이루어졌습니다. 드보르자크는 1873년 3월에 초연된 "빌라호라의 후계자들" 이라는 하레크시에 붙인 찬가가 성공, 그리고 결혼 등 그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의욕적으로 이 교향곡3번을 작곡하였습니다.



험난한 생활을 버티어낸 청년 드보르작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작(Antonín Leopold Dvořák·1841~1904)은 프라하 오르간학교 졸업 1년전인 1858년부터 콤작(Karel Komzák)의 악단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무대에 섰다. 음악학교 졸업 후에도 변변한 음악가로서의 직장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면허 있는 가업(도축업)을 계속 이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드보르작에게 결단의 계기가 찾아온다. 

1862년 왕실이나 교회의 지원이 없는 보헤미아 국민극장을 추진하던 네포무크 마이어(Jan Nepomuk Maýr)가 갓 설립한 임시극장의 부속 관현악단에서 단원을 모집하는데, 급여가 적어서인지 모집상태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바이올린은 이미 날고 기는 단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 드보르작은 비올라로 오디션을 봤고, 무난하게 합격해서 일하기 시작한다. 형편없는 박봉이어서 다른 콘서트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극장 악단에서의 연주는 그에게 오페라를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 1857년부터 바그너에 대해 무한한 찬사를 보냈던 그는 1863년 7월, 바그너 프로그램 콘서트에서 연주하며 그 독특함을 다시금 체감했다. 그는 이 시기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66년 드보르작의 습작 작곡생활에도 전기가 찾아왔다. 상임지휘자 네포무크 마이어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로 바뀌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던가, 17살 더 많은 스메타나는 25살 청년 드보르작의 작곡 재능을 알아보고 작곡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권유를 한다. 뜻밖의 격려를 받은 드보르작은 용기를 얻어 스메타나와 함께 한 기간 동안 두 곡의 교향곡을 쓰는 등 밥벌이 비올라 연주 외에 창작 쪽에서도 분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보르작은 생계 유지를 위해 중상류층 자제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나가야 했다. 젊은 그에게 현실은 그저 하고싶은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직 암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도 탈출구는 있었다. 피아노 레슨을 통해 미래의 아내를 만난 것. 청년 드보르작은 자신의 피아노 제자이자 극장의 동료인 요제피나 체르마코바(Josefína Čermáková)와 사랑에 빠졌다. 열정을 다해 작곡한 곡을 헌정하며 청혼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에 응답하는 대신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 존경하는 모차르트 선생의 사례를 따른 것인지, 1873년 32살의 드보르작은 요제피나의 동생인 13살 연하의 안나(Anna Čermáková 1854~1931)와 결혼했고 9명의 자녀를 낳았다. 1898년에 그의 넷째 딸 오튈리(Otýlie)는 부친의 제자였던 작곡가 수크(Josef Suk)와 결혼했다. 여덟째인 아들 오타카르(Otakar)는 부친의 전기를 썼다.

드보르작은 1860년대 후반부터 작곡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1870년까지 그의 작품은 알려진 초연이 없었거나 1888년 이후에 초연되었다. 스메타나의 격려를 받은 드보르작은 1871년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보헤미아 임시극장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1871년까지 그는 첫 26개 작품 중 5번까지만 작품 번호를 부여할 만큼 신중했다. 

작곡가로서의 드보르작은 1871년 6월 후데브니(Hudební listy) 저널에 처음 언급되었고, 공개연주회에 올려진 최초 작품은 ‘Vzpomínání’(프로하즈카의 음악적 저녁)라는 가곡이었다. 오페라 <왕과 석탄화로>는 옛 일터였던 임시극장에서 공연거부를 당했다. 이 작품의 서곡은 1872년 스메타나가 지휘한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초연되었지만 원곡이 포함된 전체 오페라는 1929년에야 한 번 공연된 후 다시는 공연된 적이 없다.

음악역사가 클라팜(Clapham)의 평가처럼 “바그너의 예를 따르려는  극단적 시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목만 그대로이고 대본과 음악을 새로 만든 오페라는 1874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으나 역시 반응은 시원찮았다.

1874년 33살의 드보르작은 프라하 오르간학교의 교사였던 푀르스터(Josef Foerster)의 소개로 성 아달베르트(St. Adalbert)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용되어 4년간 봉직했다. 급여는 적었지만, 젊은 드보르작 부부에게는 상당한 격려가 되었고, 드보르작은 더욱 열정적으로 상당한 양의 음악을 작곡했다.






Dvorak Symphony No.3 in Eb major, Op.10

London Symphony Orchestra
István Kertész


 

1. Allegro moderato, 
최초 2마디는 저음의 4도 하행으로 진행하며 중요한 동기로 제시됨. 제1 주제는 바이올린과 오보에로 연주됨. 제2 주제는 바이올린과 플루트로 나타남. 여섯잇단 16분음표의 활용이 돋보임. 발전부는 제2 주제를 사용함.

 

 

 

2.  Adagio molto, tempo di marcia, 
바그너에게 영향을 받은 장송곡 형태임. 중간부는 여러가지 소재를 사용함.

 

 

 

3. Finale. Allegro vivace
피콜로, 오보에, 바이올린으로 주요주제를 연주함. 고전적인 론도 형식과는 다른 구성을 취함. 작곡가의 오페라 '왕과 숯장이'의 제1장 3막의 D 장조 선율을 차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