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가요] 영일만 친구 - 최백호

jubila 2023. 8. 8. 07:28

영일만 친구 - 최백호












영일만 친구 

최백호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적 내 친구
푸른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

갈매기 나래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최고의 보컬리스트 최백호...
가수 생활 30년의 최백호(1950~부산)는 흔히 '가을 남자' 또는 '고독과 낭만의 가수'로 불린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훌쩍 떠났다. 그가 태어나던 1950년 아버지 최원봉씨는 2대 국회의원으로 한시대를 풍미하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아들의 인생을 험한 들판으로 내던지는 물꼬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아주 부농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굉장히 싫어했죠. 제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애비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저에 대한 노여움이 아주 많았죠.
하다못해 학비 한번 안 대주셨어요. 이건 개인적인 가정사지만 지금도 삼촌들과 왕래를 안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때문에 전근을 많이 다녀야 했던 어머니를 따라 그 역시 어릴 적부터 이곳 저곳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늘 외진 시골학교 사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 수업이 끝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언제나 텅빈 운동장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곤 했다.
그 순간 밀려오는 외로움과 적막함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나마 그것마저 어느정도 익숙해질 무렵이면 이내 또다른 낯선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최백호는 어릴적부터 노래보다는 그림을 더 좋아했다. 틈만 나면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던 그였다.
도화지가 없어도 됐다. 언제나 넓은 운동장이 그의 캔버스가 되어 주었다.
혼자 옹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지우고 또 다시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언제까지나 자신이 품어왔던 생각을 말없이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가 되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런 그의 꿈이 틀어지게 된 건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재수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무작정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마음먹고 들어간 군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핵 판정을 받아 1년 만에 의가사 제대를 했기 때문...


제대 후 그림을 계속 그리라는 친구들의 유혹도 많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그림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노래를 부른 건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였다. 딱히 노래를 배우진 않았어도 평소 통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던 그의 노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다행히 통기타 라이브 술집을 하는 친구네 집 덕택에 일자리를 얻었죠.
거기에서 노래를 하면서 조금씩 알려졌어요.
그렇게 음악살롱을 전전하다가
그는 당시 대마초 사건(75년)으로 가요계가
치명타를 입은 채 휘청거리던 76년 가을
데뷔곡이자 히트곡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요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후 <입영전야> <그쟈> <영일만 친구> 등 연속 히트를 치며 인기 가수의 대열에 올랐다.
그 즈음 그는 탤런트 김자옥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혼 후 한동안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84년 지금의 아내 손소인씨를 만나 긴 방황의 끝을 맞이한다. 손씨를 만난 건 친구집에서였다.
친구 부인의 친구인 손씨는 최백호보다 10년이나 아래였다.
첫눈에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손씨를 ‘감히’ 자신의 상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손씨와 마주치는 기회가 몇번 있었다.
예식장에서, 백화점에서…
자신이 노래하는 곳에 친구 부인과 같이 오기도 했다. 볼수록 정감이 가는 여자였다

“그렇게 몇 번 보니까 좋더라고요.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했죠. 만나고 싶다고…
심각한 자리를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제 친구가 그러지 말고 자신이 전화할 때마다 자기집에 놀러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의 집사람이 올 때마다 전화를 한 거예요.
꼬박꼬박 갔죠.
그랬더니 나중에 집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가 갈 때마다 내가 있으니까 처음엔 제가 그 집의 하숙생인 줄 알았대요.  그렇게 만났어요.”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처가의 반대가 심했다.
심지어 장인어른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최백호는 “아마 저라도 반대했을 거예요. 나라면 아마 끝까지 반대했을 거예요”라며 슬쩍 웃어보인다.

손씨는 집에서 살림만 한다.
그리고 그의 외동딸 솜이(22)는 현재 미국에 있는 처갓집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다.
집사람이 가끔 미국에 들러 딸을 보고 오곤 한다.
“집사람이 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전 그런 스타일이 좋아요.
정이 많다는 게 좋은 건 아니거든요.
저는 남남끼리 만나자마자 선뜻 형님 동생 하며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부담스럽거든요.

저는 사람을 10년을 만나도 말을 놓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쉽게 뜨거워지는 건 아무래도 쉽게 식는 법이죠.”
지난해(2007) 4월부터 그는 라디오 음악프로의 DJ를 새로 맡아 진행중이며 미사리 카페촌에서 매일 밤 노래를 부르며 여전히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것으로 전해진다

흐르는 노래는 79년에 발표된곡으로
실제로 영일만에 사는 그의 친구의 이야기를 노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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