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명화감상] Gone With The Wind (영화 : 바람게 함께 사라지다)

jubila 2024. 4. 4. 16:43

Gone With The Wind (영화 바람게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바람게 함께 사라지다)


1939년 제작
감독: Victor Flemming
/주연: Vivien Leigh,   Clark Gable
음악: Max Steiner / 238분

















 

 

 

 



요즈음이야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그지없는 남 녀 평등 사상의 시대이지만,  이런 평등 사상이 형성이 되고 정착되기까지 그동안의 여성해방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남성 우월주의가 당연시되던 1930년대에, 미국에서도 아주 보수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 남부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Atlanta)에서 처음 선을 보인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949, 미국)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라는 제목의  소설을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교육 속에서 자라나, '디 애틀랜타 저널'에서 기자로 활동을 하면서, 어릴 때, 어머니가 보여준 ‘폐허가 된 대저택’에서 영감을 얻어, 10년에 걸쳐 완성을 했다는 이 대하소설에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살아남는 생존(Survive)'이라고 저자도 직접 말한 적이 있지만, 그러나, 여주인공으로 등장을 한 스칼렛 오하라라는 생의 의욕에 가득 찬 강인한 한 여인이 소설과 영화를 통하여 남긴 크나 큰 영향이야말로 이후 ‘여성 지위 향상‘에 엄청나게도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STORY

미국 조지아 주, 타라(Tara)에 큰 농장을 소유한
제럴드 오 하라(Gerald O' Hara)(Thomas Mitchell, 1892-1962, 미국 뉴저지)의
세 명의 딸 중에 장녀인,
스칼렛 오 하라(Scarlett O' Hara /Vivien Leigh, 1913-1967, 인도)는
활달한 성격에다 매력적인 외모로 뭇 남성들에게 인기가 만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이웃, 트웰브 옥스(Twelves Oaks)에 살고 있는
애쉴리(Ashley Wilkes/Leslie Howard, 1893-1943, 영국)를
짝사랑하고 있는데, 그런 애쉴리가 그만 자기가 아닌
멜라니(Melanie Hamilton/Olivia De Havilland, 1916, 일본)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엉뚱하게도 멜라니의 남동생인 찰스와 황급히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만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를 한 (남편)찰스는
개전 초기에 그만 전사를 하고,
상중의 스칼렛은 타라를 떠나 애틀랜타에 있는 시누이,
멜라니의 집에서 기거를 하면서,
북군의 해안봉쇄를 뚫고 전쟁 물자를 공급하여 영웅대접을 받는
레트 버틀러(Rhett Butler/Clark Gable, 1901-1960, 미국 오하이오)선장을
알게 되는데, 스칼렛이 오래전에 애쉴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현장을
목격한 바가 있는 레트는 그런 활발한 스칼렛의 성격에 반해
구애를 하지만 쌀쌀맞게 거절만 당하게 된다.

애틀랜타가 포격을 당하면서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임신한 멜라니와 함께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하던 스칼렛은
멜라니의 출산을 직접 도와준 후, 레트에게 도움을 청하여
타라로 다 함께 마차를 타고 피란을 오는데,
타라 역시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고,
남은 돈은 고사하고, 먹을 것조차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의지하던 레트마저 입대를 하고,
이제 혼자서 모든 것을 꾸려나가야 하는 가장이 된 스칼렛은
살인과 도둑질, 사기 등을 해서라도 다시는 절대로
굶지는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울면서 점점 강해져간다.
그리고 흑인 노예들이 하던 밭일까지 직접 나서서 다 하면서
점점 더 억척스러워지는데,
종전이 되고, 새 정부가 부과한 300달러의 세금 때문에
타라를 팔아야할 위기에 처한 그녀는 동생, 수 엘렌 의 애인인
후랭크 케네디(Frank Kennedy/Carroll Nye)와
전격 정략결혼을 하면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이어 싫다는 애쉴리를 끌어들여 남편과 함께 셋이서
애틀랜타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명예보다는 돈을 선택하며 욕을 먹어가면서도
악착같이 부자가 되어가는 스칼렛.
하지만 비밀리에 북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공작을 하던
남편, 후랭크가 어느 날 갑자기 객사를 하면서 또 다시 미망인이 된다.

그러자 그동안 줄곧 스칼렛의 주위에서만 머물러 오던
레트가 마침내, 이때라는 듯이 청혼을 하고,
둘은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타라를 전쟁 전 같이 화려하게 복구를 하고,
애틀랜타에도 대저택을 마련한 후 살림을 차리고
또 딸 보니도 낳게 된다.
드디어 이제는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스칼렛.
그러나 스칼렛이 아직도 여전히 애쉴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레트가 알고 난 후, 이들 부부사이는 순탄치 못하다.
그리고 어린 딸이 낙마사고로 급사를 하고,
또 착한 멜라니까지 병약하여 죽고 나자,
레트는 스칼렛에게 이혼을 제의하고, 찰스톤으로 떠나려 한다.
멜라니의 죽음을 임종하면서, 그 오랜 세월동안 자기는
애쉴리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레트에게 매달리는 스칼렛.
하지만, 난 할 만큼 다했다며 기어코
레트가 냉정하게 떠나가 버리고,
이제 스칼렛의 머릿속에는 고향 ‘타라’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타라! 그래! 이제 타라로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그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생각을 해보자....
결국 내일은 나에게 또 다른 날이 될 테니까........“



 

 













 

 




작가주의적인 감독의 영화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제작사 나 제작자들의 간섭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만, 그러나 원래, 20세기 초의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은 제작자(Producer)의 막강한 힘에 의해서 움직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혼자 원맨쇼를 하듯 이 영화를 아주 힘겹게 완성한 미국의 명제작자,
데이빗 오 셀즈닉(David O Selznick. 1902-1965, 미국 피츠버그)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이 없었다면 ‘영화 중 의 영화’라고 하는 이 엄청난 대작은 아예 탄생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무성영화 시절의 감독 아들로 태어나 나중에 MGM으로 합병을 한 메이어(Mayer)영화사의 사장사위가 되면서, RKO 라는 영화사를 차려 성공을 한 그는 1936년에 A Selznick International Picture를 또 다시 설립하여,
당시의 경제 대공황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미국국민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기위한 한편의 대작을 기획하였다.  마침, 남북전쟁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적인 주제인 마가렛 미?의 원작소설이 같은 해 6월30일에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최고의 액수인 5만 달러에 판권계약을 마친 그는 당시의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시드니 하워드(Sydney Howard. 1891-1939, 미국 CA)에게 즉시 1,037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을 줄이는 각색을 의뢰하고, 제작에 돌입함으로서 향후 3년 동안, 일생일대 최고의 모험을 하게 된다.
매스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시작된 스칼렛의 캐스팅은 인기투표 1위의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를 비롯하여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라나 터너(Lana Turner), 폴렛 고다르(Paulette Goddard)등,
당시의 인기 여자배우들이 전부 물망에 올랐으나, 정작 영화의 사전홍보에 초점을 맞춘 셀즈닉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누가 스칼렛을 연기할까요?(‘Who'll Play Scarlett?’)라는 타이틀로 공개오디션을 벌였고,
가는 곳 마다 500명이상의 지원자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나, 절친한 친구인 조지 쿠거(George Cukor. 1899-1983, 미국 뉴욕)를 감독으로만 선정해놓고, 또 시나리오가 완성이 된지 5개월이 지난 1938년 초까지도 남녀주인공을 정하지 못한 채, 거금 40만 달러만 허비하면서 첫 번째 부도위기를 맞는다.
결국 MGM의 125만 달러의 자본참여로 동업이 이루워 지면서, 메트로(Metro)의 전속이었던 클락 게이블(Clark Gable)의 남자주인공 문제도 쉽게 해결을 보고, 또, 연인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의 뒤를 따라 미국으로 온 비비안 리(Vivien Leigh)에게 오하라 역을 맡김으로서1938년 12월10일에 애틀랜타 시내가 불타는 장면부터 드디어 촬영이 시작이 되는데, 이는 ‘킹콩(1933)’이나 ‘왕 중 왕(1927)’등의 기존 세트를 불태워 없애고,
그 자리에 이 영화의 새 세트를 짓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고 하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은 셈이고, 당시에 할리우드에 있었던 테크니컬러 카메라 7대가 전부 동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1월말에 전체 캐스팅을 마치고, 
비비안 리에게는 올리비에도 일절 만나지 못하게 하면서
본격촬영에 들어간 쿠커 감독은 마음대로 대본을 수정하는 제작자, 셀즈닉과 싸우면서 중도에 기권을 하게 되는데, 이 문제는 후임감독인 빅터 후레밍 (Victor Fleming. 1899-1949, 미국 CA)이 메가폰을 잡고서도 여전하여서, 후레밍 감독도 중도에 2주 동안 무단잠적을 하는 해프닝이 발생할 정도로 셀즈닉이 직접 대본도 쓰면서  왕 감독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한 예산과 촬영기간이 예정보다 초과되면서 은행을 포함하여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오게 되고, 또 샘 우드(Sam Wood. 1883-1949, 미국 필라델피아)감독과 조감독들까지 모두다 투입을 하여 동시에 6곳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가운데, 각성제를 먹으면서 계속 강행군을 하던 셀즈닉은 신경쇠약 일보직전에서 그해 여름,
125일간의 촬영을 
드디어 마무리하게 되는데 (오늘날 같았으면 200일 이상 소요 예상),
하지만, 하도 대본을 수정하여 완성된 정식 각본이 없는 실정이다 보니, 50만 피트 필름을 2만으로 줄이는
편집 작업까지도 자신이 직접 관여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1939년 9월9일, 일차로 가편집된 필름을 차에 싣고, 무작정 LA인근의 리버사이드 폭스 극장을 찾아간 셀즈닉 일행은 제목도 음악도 없었던 이 영화의 무료 시연회를 관람한 그곳 주민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엄청난 반응에 고무되어, 크리스마스의 개봉 예정일에 맞춘 마지막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보충 촬영과 손으로 일일이 그려 넣는 특수효과들,
그리고 'Damn'이라는 단어하나로 벌어진 검열관의 치열한 싸움을 끝으로 1939년12월11일에 최종완성을 본 영화는 15일부터 원작자, 마가렛 미첼의 고향, 애틀랜타에서 최초의 시사회를 가지게 되는데, 3일간의 이 행사는 마치 시민들 모두가 참석을 한 큰 축제의 분위기로 온통 난리법석이었고, 공항에서의 도착모습과 개선장군들과 같은 시가행진모습 등이 전국에 뉴스 필름으로도 배급이 되면서 그해 크리스마스에 LA 와 뉴욕을 시작으로 전국에 개봉이 된 이 영화에 온 국민들이 열광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미 이 영화가 개봉이 될 때에는  미국국민의 절반이상이 미첼의 원작소설을 읽어,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지만, 이 영화야 말로 전 세계인들에게 이 작품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또, 그해 9월1일에 있었던 나치의 폴랜드 침공으로 어두워졌던 사회적 분위기가 일순간에 반전이 되면서,
그 마력은 다음해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1940년 1월29일에 앰버서더호텔에서 열렸던 제12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들을 포함한 무려 8개의 본상과 2개의 특별상을 휩쓸며, 벤허 (1959)이전까지 최고의 영화로서의 역사적인 기록을 미리 자축하게 되었다.
타이타닉 (1997) 이 16억 달러이상을 벌어들이며 오늘날의 영화가 큰 산업이란 걸 증명하였지만,
모든 시설이 변변치 않았던 당시의 여건 속에서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9억 달러이상을 벌어들였다고 하면
셀즈닉의 말대로, 그건 기적 외에 다른 단어로는 도무지 설명을 할 수가 없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내, 극장관객 수로는 타이타닉을 앞지름)

말러(Gustav Mahler)밑에서 애제자로 음악을 공부한 바 있는 오스트리언, 맥스 스타이너(Max Steiner. 1888-1971, 비엔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브로드웨이에서 지휘를 하다,
1928년에 할리우드까지 진출을 하였는데, 셀즈닉과 알게 되면서 그가 만든 킹콩 (1933)의 음악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을 한다.
그리고 계속 셀즈닉과는 친구사이가 되어 셀즈닉이 만든 다섯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역시도 개봉이 2개월 밖에 남지가 않은 1939년 10월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의뢰를 받은 이 대작의 오리지널 스코어로 생애 최고의 음악을 전 세계에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특히 듣자마자 즉시 느낄 수 있는 이 영화, 메인 테마(Main Theme)곡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그의 이름, 맥스와도 같이 그의 능력을 최대치로 맥스 시킨 듯 한 느낌도 드는데, 이곡은 스칼렛의 고향이름을 붙여
타라 의 테마(Tara's Theme)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이 Tara's Theme을 근간으로 하면서,

‘Sweet And Low’, ‘When The Johnny Comes Marching Home’, 그리고 ‘When The Cruel War Is Over’ 등의
전통적인 남부 음악들을 가미해 가면서 오버추어(Overture)와 중간 휴식 음악, 그리고 마지막 퇴장 음악(Exit Music)을 포함하여 4 시간 가량의 기나긴 교향곡 같은 스코어(OS)를 무난하게 잘 완성하였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타라 의 테마(Tara's Theme)' 가
TV의 주말의 영화시간에 오프닝 타이틀곡으로도 오랫동안 사용이 되면서 더욱 더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의 수녀학교를 다녔고, 1935년부터 10편 가까운 영국 영화에 이미 출연을 한
25세의 유부녀, 비비안 리는 마치 스칼렛이 애슐리에게 매달리듯, 미국으로 영화출연을 하기위해 떠난 연인,
로렌스 올리비에 (Lawrence Olivier, 1907-1989, 영국)를 붙잡기 위해, 1938년 가을에 뉴욕 행 여객선에 오르면서 미국의 원작소설을 휴대하였고, 또, 여러 번 열독을 한 후, 그 오하라 역을 맡기 위해, 올리비에의 미국 에이전트인 셀즈닉의 친형(Myron)에게 접근을 하였고, 결국 그동안 1,400명이나 되는 미국의 여자배우 후보들을 모두 다 물리치면서, 다크호스로 그해 크리스마스에 영예를 독차지하였지만, 이 영화 촬영 중에는 감독의 주문 때문에 딱 두 번만 올리비에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40년 8월30일에 미국 산타 바바라에서 로렌스 올리비에와 재혼에 성공을 함.)

어쨌든 외모에서부터 풍기는 그녀의 도도한 카리스마를 무기로 해서,
18인치 허리사이즈의 16세의 소녀 스칼렛역부터 시작하여, 원작의 캐릭터보다도 더욱 더 ‘셀즈닉의 스칼렛’을 멋지게 창조해낸 그녀의 당찬 연기야말로 당시의 여성들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촬영 전부터 버틀러 역으로 대중들의 인기투표에서 줄곧 1위를 고수하던 클락 게이블은 처음엔 떨떠름한 상태로 출연을 하였다지만, 클락 게이블이 없는 이 작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역시 사나이중의 사나이다운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그리고 워낙 대단한 성공을 한 일생일대의 대작을 만들고 난 셀즈닉은 이후에도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 1949) 같은 명작들을 계속 만들었지만,
항상 이 작품보다는 못하다는 평판에 시달리다가, 재정적인 위기를 견디지 못해 이 영화의 모든 판권을
1944년에 헐값으로 매각을 하면서 하향 길을 걷게 되고, 1957년에 ‘무기여 잘있거라(A Farewell To Arms)’를 끝으로 할리우드를 부흥시켰던 지난 35년간의 제작자 생활을 마감하였고,
1965년에 그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할리우드에서 영면을 하게 된다
(생전에 무려 83편을 제작함).


70mm로 재 프린팅을 한 최근의 필름을 통하여 또는 첨단 기술로 특별 제작을 한 DVD등을 통하여,
이 작품을 다시 본 사람들은 우선 제일 먼저 이 영화가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곤 당시로서는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그 방대한 스케일에 다들 놀라기도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역사상 최고의 영화‘ 이상으로의 더 많은 가치를 지닌 이 작품에 모든 걸 걸고  올인 하였던 할리우드의 위대한 전설적인 제작자, 데이빗 오 셀즈닉(David O Selznick)의 존재는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점점 망각 되어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후레밍 감독, 클락 게이블, 비비안 리, 모두가 그의 꿈과 이상을 대신 표출하였던 분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또 기획에서부터 재정적인 경영과 대본집필에서 촬영, 그리고 편집까지 그가 손을 대지 않은 분야는 한곳도 없을 만큼 이 영화는 셀즈닉의 모든 것이었으며, 이 영화 제작, 이십년 후에 만들어진 벤허 (1959)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결코, “바람과 함께 사라질 수가 없는“ 정말로 자랑스러운 ‘인류의 영원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