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올드팝] Annie Laurie (애니로리) - Deanna Durbin, Sheila Ryan

jubila 2024. 5. 25. 19:13

Annie Laurie (애니로리) - Deanna Durbin, Sheila Ryan








Annie Laurie 

(애니 로리)
Scotland 민요. William Douglas 詩. Alicia Scott 편곡

Deanna Durbin, Sheila Ryan, 

 

Maxwelton's braes are bonnie
Where early falls the dew
And 'twas there that Annie Laurie
Gave me her promise true.
Gave me her promise true
(Which never forgot will be)
And for bonnie Annie Laurie
I would lay me down and die.

Her brow is like the snowdrift
Her throat is like the swan
Her face it is the fairest
That ever the sun shone on.
That ever the sun shone on
(And dark blue is her eyes)
And for bonnie Annie Laurie
I would lay me down and die.
Yes I lay me down and die.
맥스웰튼의 아름다운 강둑에
아침 일찍이 이슬 내리고,
그곳은 애니 로리가 나에게
진실한 약속을 했던 곳.
진실한 약속을 했던 곳.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애니 로리를 위해서라면
내려가서 빠져 죽을 수도.....

그녀의 이마는 눈덩이처럼 곱고
가느다란 목은 마치 백조 같아.
얼굴엔 최고로 새하얀 살결.
지금까지 태양이 비춰본 것중에
지금까지 태양이 비춰본 것중에.
(그리고 짙은 파란색의 눈)
아름다운 애니 로리를 위해서라면
내려가서 빠져 죽을 수도.....
그럼요. 내려가서 빠져 죽을 수도 있지요.












데아나 더빈을 오페라 디바 중 한사람으로 분류한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데아나 더빈을 세계적인 디바라고 부르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데아나 더빈은 메트로와 같은 오페라 무대에 등장하여 주역을 맡은 일은 없다. 아마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10여편에 이르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면서 오페라 아리아를 불렀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오페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다른 어느 디바들보다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고 할수 있다. ‘천사의 음성’ ‘가장 재능있는 소프라노’ ‘위니펙의 사랑스런 여인’ ‘하늘이 내려준 놀라운 재능의 소프라노’라는 얘기를 들은 데아나 더빈은 1921년 12월 4일 캐나다 마니토바주의 위니펙(Winnipeg)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데아나 더빈의 어릴때 세례명은 에드나 매 더빈(Edna Mae Durbin)이었다. 어린 에드나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평범한 소녀였다. 어느 누구도 어린 에드나가 나중에 셜리 템플(Shirley Temple)을 능가하는 인물이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에드나는 열 살을 지나서부터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그 때쯤해서 에드나는 부모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에드나는 우연한 기회에 아역배우로서 쇼 프로그램에 나가기 시작했고 이름도 데아나 더빈이라고 바꾸었다. 데아나 더빈은 14세 때에 ‘전미청소년장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일이 있다. 마침 아역배우를 찾고 있던 MGM이 데아나 더빈의 뛰어난 소질과 용모를 보고 전격 스카웃하였다. MGM은 역시 청소년 배우인 쥬디 갈란드(Judy Garland)와 함께  ‘Every Sunday'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대히트를 기록하였고 그후로  데아나 더빈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마다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렇게하여 그는  일약 할리우드의 대스타로서 전국적인 우상이 되었다. 데아나 더빈에 대한 인기가 어느정도였냐하면 18세 때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 배우가 되었던 것만 보아도 알 있다. 1940년대 초 당시, 그의 1년 출연료 수입은 25만불이 넘었다. 데아나 더빈의 음성은 ‘말할수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평을 받았다.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의 지휘로 부른 어떤 갠날’(나비부인)은 오페라 아리아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가 출연했던 최고 인기 영화는 one Hundred Men and a Girl(우리나라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소녀‘라고 번역되어 상영되었음)일 것이다. 역시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지휘를 맡았으며 이 영화에서 데아나 더빈은 모차르트의 알렐루야를 불러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데아나 더빈은 실로 모든 사람들의 우상이었다. 데아나 더빈 인형과 그가 영화에서 입었던 옷들은 날개가 달린듯 팔린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어떤 건축회사는 데아나 더빈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자기 회사의 모델주택을 데아나 더빈 가옥이라고 이름 붙였다. 영화에서 데아나 더빈이 첫 키스 씬을 가진 것은 모든 신문의 톱 기사였다. 데아나 더빈의 노래는 물론 몸짓 하나하나가 세계의 유행이 되었다. 데아나 더빈은 1939년 Three Smart Girls Grow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최우수 여자 아역상을 받았다. 그때 남자 아역상은 미키 루니였다. 아카데미 심사위원회는 데아나 더빈이 젊은이들에게 ’노력하면 성취할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고 높이 치하하였다.

무엇이 데아나 더빈을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 데아나 더빈이 어른 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할리우드의 최정상급 아역배우 겸 소프라노로서 인기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는 돌연 은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27세 때인 1948년, 마지막으로 For The Love of Mary라는 영화에 출연하한 직후였다. 십대의 아름답고 재능있는 소녀로서 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래서였다. 그의 두 번에 걸친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1950년 영화감독인 프랑스의 샤를르 앙리 데이빗과 세 번째 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아주 특이한 계약을 맺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혼자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데아나 더빈의 은둔 생활은 완벽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파리 교외의 노플-르-샤토(Neauphle-le-Chateau)에 정착했다. 그리고 194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와도 인터뷰하지 않았으며 영화회사들의 끈질긴 출연 교섭도 단연코 거절하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마리오 란자가 1950년대 초에 데아나 더빈과 함께 음악영화에 출연하자고 간청을 했지만 그마저도 거절하였다. 만일 데아나 더빈이 진정한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진출했다면 비벌리 실스를 능가하는 콜로라투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대 생활을 포기하고 어릴때의 화려했던 경력을 추억속에 간직하였을 뿐이었다. 비록 데아나 더빈이 은둔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매일 수많은 팬레터가 답지하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에는 팬클럽이 생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데아나 더빈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소녀’로 남아있다.



 

Deanna Durbin




 

 

 

Sheila Ryan




 

 






목소리랑 모습  모두 모두 아름다운
캐나다 출신 인  Sheila Ryan .
아일랜드 출생으로 아일리쉬 하프와 기타에 능숙하며
아일리쉬 캘틱음악을 주로 하고 있다.
그녀의 대표곡은 Evening Bell(상사화)로 잘 알려저 있다.





애니로리(미국식 발음) or 안니로리(영국식 발음)"Annie Laurie"는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시(市) 맥스웰턴(Maxwelton)에 살던 로버트 로리(Robert Laurie) 경의 막내딸로 실제 인물이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출신 군인이었던 William Douglas(1672~1748)를 사랑하였으나 아버지 Robert Laurie경의 반대로 결혼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에니 로리'는 십대 중반으로 너무나 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각각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지만  William Douglas는 자기 곁을 떠난 Annie Laurie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1720년에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존 스콧(John Scott) 부인이
시집 [스코틀랜드의 노래]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곡을 붙여 [애니 로리]라고 하였고,   
핀레이 던이 반주를 넣어 1838년 에든버러에서 출판된[스코틀랜드 민요집]에 실었다


이후
크림전쟁이 일어나자 크림반도에 상륙한 스코틀랜드(Scotland) 군인들이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져나가 스코틀랜드 민요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곡을 초기 한국 선교사였던 스왈른(W. L. Swallen) 선교사가 1905년에 한국적 정서에 맞게 개사하여 전파한 곡이 舊찬송가 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