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관현악]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jubila 2024. 6. 2. 03:43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Tchaikovsky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Op. 35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1 Allegro moderato,     2 Canzonetta. Andante,     3 Finale. Allegro vivacissimo

Julia Fischer, violin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Vasily Petrenko, conductor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1878년에 작곡되었고 초연은 1881년에 발표하였다.




4대 바이올린협주곡 중의 하나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멘델스죤 (E단조)을 제외한 세 곡의 협주곡이 모두 D장조로 쓰여진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바이올린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을 낼 수 있는 조성이 D장조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화려함과 애절한 멜로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곡이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비해 이 장르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좀 더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처음 작곡될 당시 많은 말썽을 일으켰었던 작품이었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심한 우울증 증세에 빠져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에 작곡되었다 (1878년, 당시 38세). 이 기간은 그가 교향곡 제 4번과 "에프게니 오네긴" 등을 작곡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 때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코데크라는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초고가 완성된 후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답변은 차갑기만 했다.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초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실망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3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었는데, 아돌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칭찬하면서 발표할 것을 적극 권하여 1881년 12월에 빈 필과 한스 리히터의 반주로 브로드스키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연당시의 평은 무척 나빴다.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이 곡에 호의적이지 못했고 브로드스키의 완성되지 못한 기교는 청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결정적으로 독설가였던 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우리는 천하고 품위없는 얼굴만 봤고 거칠은 고함소리만 들었으며, 싸구려 보드카의 냄새만 맡았다. 프리트리히 피셔는 짜임새없는 그림을 비평할 때 '보고 있노라면 냄새가 나는 그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이 곡은 음악작품에도 들어서 냄새가 나는 작품이 있을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한슬리크의 혹평을 들은 차이콥스키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이 곡의 가치를 굳게 믿고 있던 브로드스키는 유럽 각지에서 이 곡을 계속 연주하여 결국 청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나중에는 아우어 교수도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여 스스로도 연주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곡은 많은 공로를 가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슬리크가 말한 것처럼 강렬한 러시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1악장의 야성적인 주제나 2악장의 슬라브적 애수가 어린 선율, 3악장의 광포한 리듬과 열정적인 끝맺음 등은 러시아외의 유럽 작곡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색채가 넘치는 것들이다. 또한 아우어 교수가 처음에 연주가 불가능할것이라 예견했을 정도로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신예 바이올리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기교를 세상에 과시하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878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생활에서 온 우울증(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마지못해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치료차 스위스 제네바 호수 연안의 클라렌스 리조트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그곳을 그의 제자인 요시프 코테크(Yosif Kotek)가 찾아왔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즐겨 연주했다. 그러던 중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으로 자신의 평생 후원자가 되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때의 사정을 적어 보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하는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작품에 끌렸습니다. 방문객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어서 이런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연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곡의 바이올린 독주 부분은 코테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작곡은 매우 빨리 이루어져 한 달 안에 곡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을 버리고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가 이듬해 8월에 출판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연주 경력이 많지 않아 명성이 없었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코프스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에서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을 맡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만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여를 기다리다 지친 차이코프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비르투오소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지휘로 초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째 하루 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 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그러나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계를 주름잡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등.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이어 8월 20일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코프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Tchaikovsky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Hilary Hahn
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 · Vasily Petrenko



1, Allegro moderato - Candenza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제1악장은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장쾌함이 절묘하게 어울린 소타나 형식의 악장으로 서주에서 시작되는 주제 부분이 카덴짜(즉흥 연주부분)와 서로 밀고 당기며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절정에 이르게 되면 숨가쁘게 전개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들이 정말 눈부신 감동을 느끼게 한다. 가슴속이 서늘할 정도로 장쾌함이 밀려와서 문득 정신을 가다듬으면 바로 1악장의 연주가 끝이 난다.

 

 

2, Canzonetta (Andante)
슬라브적 애수 어린 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악장이다. '칸쪼네타(Canzonetta)'로 되어있는 A-B-A의 3부 형식인데, '칸쪼네타'는 이탈리아의 포퓰러송을 뜻하는 칸초네(canzone)의 축소형으로 주로 16~17세기에 유행했던 가벼운 기분의 작은 가곡작품을 뜻하는 말로, 그냥 '작은 노래'라고 하면 된다. 흐느끼듯 아름답고 애수어린 멜로디가 곡전체를 지배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데,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황홀한 매력에 빠지게 하는 이 2악장은 차이코프스키만의 매우 슬라브적인 정서가 풍부하게 나타나는 선율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이 곡은 명확히 끝나는 부분이 없이 첼로 등 현악기들의 저음을 바탕으로 혼(Horn)과 함께 애절함을 장식하다 끝난 것 같지도 않게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어서 깜짝 놀랄만큼 강렬한 음량이 터지면서 곧바로 열광적인 3악장 연주와 연결된다.

 

 

3, Finale (Allegro vivacissimo)
화려하고 여유로운 소나타형식의 악장이다. 2악장에서 이어진 곡은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열광적인 리듬의 축제로 변하게 된다. 중간 부분에서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의 선율로 잠시 우수어린 연주가 이어지다가 제시부의 첫선율이 다시 나타나기를 되풀이 하면서 점점 열기를 고조시켜 나간 후 마지막에 환희에 넘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총연주로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