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교향곡] 하이든 교향곡 제74번

jubila 2024. 6. 24. 21:22

하이든 교향곡 제74번




Haydn,Symphony No. 74 in Eb Major Hob I:74
하이든 교향곡 제74번 내림마장조

Franz Joseph Haydn, (1732~1809)
1. Vivace assai,    2. Adagio cantabile,    3. Menuetto: Allegretto,    4. Finale: Allegro assai

The Academy of Ancient Music,
Conducted by Christopher Hogwood.










하이든의 교향곡  제74번 Eb장조는  1780~81 사이에 4악장으로 작곡 된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시골 마을이자 헝가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열두 남매를 두었지만 그 중 다섯은 어릴 적에 죽고 일곱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 중 하이든은 위에 누나를 둔 둘째였다. 아버지는 교향곡의 할아버지 마차바퀴 제작가였고, 어머니는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키친메이드 출신이었다. 양친 모두 음악을 생업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경우 민속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부모는, 로라우의 북동부에 있는 하인부르크라는 소도시에서 재직하던 음악 교사에게 하이든을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불과 여섯 살 때의 일이었는데, 말이 음악 교육이었지 실제로는 교사 밑에서 빨래 등 집안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더부살이 신세였다. 어쨌든 그곳에서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웠고, 하인부르크 성당의 성가대에 보이 소프라노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관계자가 그의 실력에 감탄해, 아버지에게 "아드님 목소리가 고우신데 카스트라토로 만드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했었다.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하인부르크에 우연히 들른 게오르크 폰 로이터라는 음악가가 하이든의 재능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빈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인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음악 감독이었다. 로이터는 하이든에게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했고, 여기에 합격한 뒤 1740년에 빈으로 이주했다.

하인부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에서도 로이터의 집에 얹혀 살면서 계속 음악을 공부했는데, 1745년에는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면서 합류했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아서 쇤브룬 궁전에 몇차례 초대받기도 했다. 한번은 궁전 내의 공사 중인 건물에서 위험한 장난을 치다가 테레지아에게 걸려서 벌로 매를 맞기도 했다고 얘기도 있다.

그러나 로이터도 이전의 선생처럼 하이든 형제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고, 1749년에 성장으로 인한 변성기가 찾아오면서 성가대에서 어쩔 수 없이 퇴단해야 했다. 로이터의 집에서도 나와야 했고, 한동안 기본적인 의식주도 형편없는 상태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다.

1752년에는 당시 꽤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에게 잠깐 수업을 받았는데, 이것이 하이든이 받은 첫 본격적인 작곡 수업이었다. 이미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혔는지, 이후에도 유명한 대위법 교재인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이라든가 초기 고전주의 작품들의 악보를 사보해 연구하는 등 이론 기반을 강화하면서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 형편은 현시창이었고, 하이든도 동시대의 많은 음악가들처럼 귀족 집안의 전속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 노력은 점차 성과를 얻었고, 툰 백작부인이나 퓌른베르크 남작 집안의 비상근 작곡가 겸 음악 교사로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퓌른베르크 남작은 하이든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1757년에 모르친 백작 집안에 악장(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으로 취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5]

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하이든은 처음으로 안정된 전속 직책을 얻게 되었고, 이 시기에 교향곡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760년에 들어 모르친 백작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이듬해에 헝가리계 귀족 집안인 에스테르하지[6] 가문으로 옮겨 부악장 자격으로 활동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당시 공작 작위를 보유하고 있던 유력 귀족 세력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꽤 높은 수준의 악단도 고용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이 집안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봉직했고,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인들이었던 파울 안톤과 니콜라우스 두 공작들을 위해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수백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사실상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신세였음에도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도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1780년대 중반 쯤에는 모차르트와도 친교를 나누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790년에 니콜라우스 공작이 타계하면서 고용주도 그의 아들로 바뀌었는데, 아들은 전임자들과 달리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다 니콜라우스 공작이 지나치게 음악에 돈을 쓴 나머지 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여서 음악에 대한 투자를 줄이기로 했다. 결국 하이든에게 상당한 액수의 퇴직금을 주고 계약을 해지했다. 프리랜서가 된 뒤에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공연 기획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의뢰로 영국을 두 차례 방문했고, 12곡의 '런던 교향곡집' 등을 비롯한 후기의 대표작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을 제자로 받기도 했는데, 서로 궁합이 잘 안맞았는지 미적지근한 관계로 끝났다.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 1795년에는 다시 빈으로 돌아왔고, 도시 근교의 굼펜도르프라는 마을에 커다란 저택을 가질 정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미사곡을 비롯한 종교음악에 전념했고, 예전의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서도 작품을 써주었다. 종교음악 외에는 트럼펫 협주곡과 현악 4중주를 비롯한 후반기의 걸작 기악곡들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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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칠십 줄을 넘긴 1802년부터 건강이 영 좋지 않게 되었고, 작곡도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7] 각지에서 하이든에게 지휘청탁이 들어왔지만 건강문제로 모두 고사한 나머지 유럽 각국에 하이든이 사망했다는 뜬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뜬소문을 들은 파리의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케루비니에게 하이든을 추모하는 작품을 청탁했고 케루비니는 하이든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담아 "하이든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작곡해 발표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이소식을 나중에 들은 하이든의 반응이 압권이다. "참 아쉽군.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가서 초연을 지휘했을 텐데."
 

하이든은 1809년에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하던 때에 타계했다.,




 
Haydn,Symphony No. 74 in Eb Major Hob I:74
Conductor: Helmut Muller-Bruhl
Orchestra: Cologne Chamber Orchestra


 

1. Vivace assai,

 

 

2. Adagio cantabile, 

 

 

3. Menuetto: Allegretto, 

 

 

4. Finale: Allegro ass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