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44년, 러시아 티흐빈의 대대로 해군에 종사하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해 10살 때 처음으로 작곡을 했지만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12살 때 가문의 전통을 잇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취미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18살 때인 1861년에 발라키레프를 만났으며, 그를 통해 큐이와 무소르그스키를 알게 되었다. 발라키레프는 그가 작곡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으며, 음악뿐만 아니라 역사, 문학, 비평 등 다양한 방면에 폭넓은 지식을 쌓을 것을 권유했다.
1862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쾌속 범선 알마즈 호를 타고 긴 항해 길에 올랐다. 하지만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오로지 음악만 생각했다.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서점에 들러 악보를 샀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베를리오즈가 쓴 관현악법에 대한 책을 읽고 연구했다. 그리고 기항지인 영국 런던, 나이아가라 폭포, 리우 데 자네이루 등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865년 5월, 그는 2년 8개월의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작곡 중이던 교향곡을 발라키레프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이 무렵부터 그를 포함한 5명의 국민주의 작곡가들은 '러시아 5인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5인조의 멤버들은 서로의 작품을 들어주고 건설적인 충고를 해 주었다. 하지만 서유럽 작곡가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멘델스존은 취향에 맞지 않고,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시대에 뒤떨어지며, 바흐는 너무 수학적이고 감정이 메말라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그너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베를리오즈에 대해서만 좋은 평가를 내렸는데, 처음에는 이런 동료들의 평가를 아무런 의심이나 검토 없이 그냥 받아들였다.
항해 중에 관현악법을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5인조 사이에서 관현악법의 대가로 통하게 되었다. 발라키레프는 그에게 슈베르트 행진곡을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죽음을 앞둔 다르고미스키는 오페라 〈석상손님〉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부탁했다.
1871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로 채용되었다. 음악원 측이 그를 교수로 채용한 것은 그가 러시아 5인조 중에서 비교적 반대파의 비판을 적게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873년, 그는 해군 군악대 총감독에 임명되었다. 군악대 악장을 감독하거나 임명하고, 연주 레퍼토리를 정하고, 악기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각 악기들의 특성과 구성 원리를 터득했으며, 이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위한 관현악법 교재를 집필했다.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음악원에서도 해군 제복을 입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음악이론과 화성학, 대위법,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음악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 러시아 5인조의 멤버들은 아카데믹한 음악교육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도 매우 중요한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향은 이 무렵에 작곡한 〈교향곡 제3번(Symphony No.3 in C major Op.32)〉과 〈현악 4중주〉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동료들은 그가 푸가나 소나타를 작곡하기 위해 러시아의 음악 전통과 유산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1884년, 군 당국이 해군 군악대 감독직을 폐지했다. 이로써 일에서 해방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때부터 1894년까지 발라키레프 밑에서 궁정 예배당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때 러시아 정교회 음악에 대해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1886년부터 신흥부자 벨야예프의 후원으로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러시아 교향곡 콘서트를 시작한 그는 이 콘서트를 위해 〈셰에라자드(Scheherazade Op.3)5〉, 〈스페인 기상곡(Cappriccio Espagnol Op.34)〉, 〈러시아 부활절 서곡(Russian Easter Festival Overture Op.36)〉 등의 작품을 썼다.
1889년,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되었다. 러시아 5인조 멤버들은 바그너를 무시했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바그너의 솜씨에 감탄했으며, 여생을 오페라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1905년,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음악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생들이 차르의 무리한 진압에 항거하며 수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부가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그가 이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군대가 신성한 학교를 짓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일로 당국의 미움을 산 그는 결국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얼마 후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내 환멸을 느끼고 사표를 던졌다. 그 후 집에서 칩거하면서 창작에만 전념했는데,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오페라 〈황금닭(Le Coq d'Or)〉이다. 이 오페라는 황실로부터 공연 불가 명령을 받는 바람에 그가 살아 있을 때 공연되지 못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과 해직, 공연 금지로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에 누웠다. 그러다가 1908년에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의 특징은 화려한 관현악법과 이국정취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스페인 기상곡〉과 〈셰에라자드〉이다. 이 중 〈셰에라자드〉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곡했다. 제1곡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는 위협적인 왕의 주제로 시작하고, 이어 하프 반주에 맞추어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셰에라자드의 주제가 나타난다. 그 후 다양한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바다의 풍경을 다채롭게 그린다. 제2곡 〈칼렌다르 왕자의 이야기〉는 먼저 셰에라자드의 주제가 나온 다음 독주 파곳이 이국적인 선율을 길게 연주하면, 오보에가 그것을 받는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한 후 분위기를 바꾸어 현악기와 금관악기들이 빠르고 격렬한 선율을 연주한다. 제3곡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는 아주 서정적인 선율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현악기들의 피치카토 반주에 맞추어 클라리넷이 가벼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경쾌한 선율이 등장한다. 제4곡 〈바그다드의 축제―바다―난파―종곡〉에서는 조급한 느낌을 주는 왕의 주제와 셰에라자드의 주제가 잠깐씩 번갈아 가며 나온다. 다음에 활기찬 바그다드의 축제 장면과 신드바드의 배가 장렬하게 부딪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지막에 셰에라자드의 주제가 왕의 주제와 조화를 이루는데, 이는 왕과 셰에라자드의 관계가 행복하게 발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