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가요] 청춘목장 - 김시스터즈, 송민도

jubila 2021. 5. 7. 16:50

청춘목장 - 김시스터즈, 송민도

 






청춘목장
작사 손석우, 작곡 송민영

송민도, 김 시스터즈


레이호 레이 레이호 레이호 레이 레이호
송아지 망아지가 맴맴 날 부른다. 배고파 운다.
아아 아아

날이 샌다. 목장에 아침이 온다.
사랑하는 그대여 어서일어나
아름다운 하루를 노래 부르자
레이호 레이 레이호 레이호 레이 레이호
파랑새 소리소리 노래 부르고
안개가 소리 없이 흘러 가면은
송이지 망아지가 맴맴 날 부른다. 배고파 운다.
아아 아아 아아

레이호 레이 레이호 레이호 레이 레이호
송아지 망아지가 맴맴 안녕 한다. 단꿈을 꾼다.
아아 아아

달이 뜬다 목장에 밤이 깃든다.
사랑하는 그대여 두 손을 씻고
즐거웠던 하루를 노래 부르자.
레이호 레이 레이호 레이호 레이 레이호
풀벌레 소리소리 짝을 부르고
밤안개 소리 없이 흘러 가며는
송아지망아지가 맴멤 안녕한다. 단꿈을 꾼다.
아아 아아

















김시스터즈는 작곡가겸 가수였던 김해송과 역시 가수인 이난영 부부의 세딸(김영자, 숙자, 애자)로 구성된
여성트리오로서,
(나중엔 김영자 대신 조카인 김민자가 활동함)이난영은 6.25가 발발하고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자 일곱 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한다.1951년 이난영은 미군열차를 얻어 타기 위해 세자매에게 영어 노래를 가르친다.
세자매의 첫무대는 피난열차였던 것이다. 미국 걸그룹 앤드루 시스터즈의 히트곡을 뜻도 모르면서 발음만 외워
노래를 했고 열살 남짓한 새자매는발음을 엉뚱하게 하는 등 실수를 연발했지만 화음을 맞춰 부르는 앙즌맞은 모습에 한국의 앤드루 시스터즈라는애칭을 얻는다.이난영은 미군부대 무대에 세우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가며 세자매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1953년 가을 김씨스터즈로 팀명을 정하고 서울 스카라극장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갖는다.
멤버들이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노래하고 춤까지 추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그룹이었다.
미8군 무데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국내활동과 병행하다가 1958년에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노래를 하는데
관객 10만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1958년 이들의 소문을 들은 미국의 쇼운영자는 주한미군 맥 매킨을 매니저로 내세워 계약을 맺고 미국 진출을 성사시킨다. 이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하락까지 맡아 1959년도에 아시아 최초로 미국으로 진출하는 걸그룹이 된다.
세자매는 미국 진출 후 더욱 노력해 10개 이상의 악기를 다루며 한국 민요를 곁들여 미국의 인기곡을 연주와 춤을 곁들여 보여주는 이색적인 그룹으로 입소문을 타며 "동양의 요정", "다이너마이트 걸트리오"등의 수식어를 받으며
인기를 한몸에 받기 시작한다.당시에도 미국에서도 여성그룹이 연주와 춤, 노래를 같이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미국 유명 쇼프로그램인 "에드 셜리번 쇼"에 33회 단골로 출연했었고 1960년 2월 유명 잡지 "LIFE"에
특집 기사가 실리기도 하는가 하면 다른 유명 잡지의 표지 모넬로 선정되는 등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이들의 골수팬을 알려진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알려지기도 했다. 처음 미국 진풀한 한국 그룹으로는 대단한 성공을 한 것이었다.

1963년 첫 정규 음반이 발매되었고 이후 이 음반은 딸들을 만나러 간 이난영에 의해 국내로 공수되면서
1964년 국네에도 발배되었다. 탁월한 곡해석과 아름다운 화음, 화려한 가창력등 명반이다.이 음반은 1960년대 대만에서도
발매된 것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지구촌 각국에서 발매된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확인할 길이 없다. 이음반의 B면 타이틀곡이면서 김씨스터즈의 가장 대표적인 히트곡이 "챨리 브라운"이다.






1947년 KBS가 처음으로 모집한 전속가수
송민도가 방송국에서 이 노래를 부르자 이 노래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여기에 편승해서 레코드가 제작되었습니다.
노래 작사자는 조명암으로 본명은 조영출이고 이밖에도
여러 예명을 썼습니다. 보수를 받던 직장이 있어서 그 외의 다른 곳으로부터 의뢰 받아 쓴 글은 예명으로 발표되는 것이 관례였던 시절이라 글 쓰는 분, 노래 부르는 분등, 연예활동을 하시던 분들은 여러 예명을 썼었습니다.
이 노래는 김다인이라는 예명으로 발표된 노래였습니다. 조명암은 일제강점기 일본유학을 마치고 많은 방송 드라마와 노래 가사를 썼지만 불행히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공산당이 불법화 되기 전까지는
그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 되고 또 1948년 8월 15일 건국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산당은 발붙일 수가 없어 월북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그가 작사한 노래들은 오랜 기간 방송전파나 레코드를 제작 할 수가 없어서 입으로만 불려 왔습니다. 이 노래 역시 그 중의 한곡이고 1989년 월복지의 노래가 마지막으로 해금 되면서 자유롭게 불린 노래입니다.
1980년대까지도
북한에서 이면상 등과 더불어 핵심적인 문예 활동을 했던 조명암의 작품은 금기시 되어
이면상 등 북한의 핵심적인 문예 활동을 한 사람들의 노래가
해금 되었을 때도 조명암의 노래는 묶여 있었습니다.
1989년 마지막으로 해금 된 것이지요.

방송국에서 송민도의 노래로 전파를 탄 이 노래는 송민숙이라는 이름으로 레코드가 제작되었습니다.
저작권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던 시절 송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코드가 제작되어 송민도 자신도
그 레코드를 접하고서야 본인이 부른 노래가
송민숙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도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송민도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라는 뜻으로 작명한 것이어서 개명이 용납되지 않았으나 그대로 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큰 일 날일이지요.

이런 노래들이 방송국에서 제작하고 방송 전파를 타면서 널리 퍼진 노래들이지만 생방송만을 했던 그 시절의 노래들은 레코드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방송이 출현한 이래 오랜 세월 방송은 생방송으로 이루어져서 기록이 없습니다. 또 녹음이나 녹화를 하던 시절에도 사용한 테잎을 지워서 다음 프로그램을 녹음, 녹화 해야 했던 시절의 자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오랜 세월 방송의
최대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방송은 전파에 실려 날려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간혹
녹음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6.25전란으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Adventurer
승부사


"이것이 아빠란다"

youtube 검색창에 "이것이 아빠란다"를 처보세요

https://youtu.be/chrFARWMfdg?list=RDUsUmxrw9-bQ 

https://youtu.be/pq6MMtPlDv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