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가요]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 - 박인수

jubila 2023. 11. 28. 01:14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 - 박인수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

박인수


이렇게 가는 것이 세월이라면 
너무나 아쉬워 너무나 아쉬워지네
그토록 사무치던 지난 날들은
이제는 쓸쓸히 아쉬움 남기며
나에게 손짓하네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
당신은 달을 보고 웃어 보셨나요?
당신이 그리워지면
울던 그 날은 덧없이 흘러 갔지만
애타게 그리던 내 마음속에는 영원히 영원히 남으리
두눈을 감으면 또다시 그날을 생각하네
당신은 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
당신은 저 달을 보고 웃어 보셨나요
당신이 그리워지면 울던 그 날은 덧없이 흘러 갔지만
애타게 그리던 내 마음속에는
영원히 영원히 남으리 두눈을 감으면
또다시 그날을 생각하네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김기표 작사/작곡)는 1980년 발매된 Soul 가수「박인수」의 앨범 타이틀 곡으로 그의 인생 스토리 같은 가사 내용이 인상적인 소울 곡이다.

한국 Rock의 대부 "신중현 선생"의 회고록에 의하면,
"내 사단 최초의 남자 가수 「박인수」가 절창(絶唱)하던 모습을 영영 잊지 못 한다. 두 손으로 뭔가 쥐어 짜 올리는 듯한 특유의 무대 매너, 거기에 완벽한 흑인 영어 발음 등 「박인수」는 그야말로 한국화 된 흑인이었다.

그와 맞닥뜨린 곳은 미 8군 소속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서울 이태원 입구의 클럽 ‘NX-1’이었다. 1967년 어느 날 거기서 연습을 하던 중 「박인수」가 자기를 한 번 테스트 해 달라며 찾아왔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소울(soul) 음악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금방 돌아오는데, 자신감이 느껴졌다.
테스트를 해 보았다.
'Temptations'의 ‘My Girl’과 'Otis Redding'의 ‘Dock Of The Bay’ 같은 곡은, 한 번 불렀다 하면 그야말로 흑인이 울고 갈 정도 였다. 거기에다 'Platters', 'Sam Cook', 'Ray Charles' 등 흑인 가수의 노래라면 못 하는 게 없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그 클럽은 원래가 백인 전용 클럽이어서 흑인들은 원한다면 문 간에 서서 음악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흑인 한 명이 문간에 붙어 음악을 훔쳐 듣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듣다 말고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 아닌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우르르몰려 온 흑인들은 「박인수」의 ‘모션’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게다가 「박인수」가 흑인 특유의 은어(slang)를 몇 마디 구사하자 그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거기는 백인 클럽. 노래를 끝내자마자 지배인이 오더니 당장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의 위선(僞善)을 절감(切感)했다.
나는 「박인수」를 연세대 앞의 내 사무실로 데려갔다. ‘봄 비’만 갖고 1주일 내내 연습 시킨 뒤, ‘펄’과 '김추자'의 히트곡을 섞어 음반을 한 장 냈다. 뒤이어 시민 회관에서 가진 무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봄 비’ 후렴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아 올린 절창(絶唱)에 공연장이 떠나갔다. 국내 최초의 소울
무대였다. 아마 어릴 적 기지촌에서 자라 그 곳 무대에서 봐 둔 듯 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박인수」하면 ‘봄 비’다.

미 8군이 철수하고 난 뒤에도 「박인수」를 주변의 비공식 무대에 데리고 나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졌던 6개월 간의 무대였는데, 흑인들은 그의 언행(言行) 하나하나에 죽고 살았다.
요즘 흑인들이 여대생들한테 인기가 있다던 데, 당시 ‘흑인보다 더 한 흑인의 영혼’을 지닌 「박인수」에게 쏟아졌던 열광은 아마 지금보다 더 했을 거라 믿는다.

그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는 여성 팬들에게 납치되는 일마저 종종 있었으니,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여자들을 실제로 보고 많이 놀랐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에게 너무 인기가 너무 많다 보니 사생활이 흐트러진 점이다.
하기 사 「박인수」의 삶이란 게 ‘브레이크가 없는 것'이었다.
 
「박인수」가 속해 있던 그룹 ‘퀘션스’가 해체된 것 역시 스타로 부상 (浮上)하고 난 「박인수」가 활동을 소홀히 했던 탓이 크다.
나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활동 금지된 그는 두 차례의 결혼 실패 후 여지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박인수」는 태생적으로 슬픔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 입양된 후 귀국했으나,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정(情)을 붙일 곳이 없었다.
미국에서 난 데 
없이 혈육이 찾아 왔다는 등 알 수 없는 소문만 뒤를 이었다.

1980년대 “몸이 아프다. 도와 달라” 며 종종 나를 찾더니 1995년 후배 연예인들과 대마초로 구속되고 말아 안타까운 마음 뿐 이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은 1997년 후배들이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마련한 나의 헌정 공연 분장실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의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잡더니 돌아갔다. 그래도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까.
2002년 6월 후배들이 저혈당 등으로 고생하는 그를 위해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를 열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이미 연락이 끊긴 지 오래 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명의 내 사단 멤버를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