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관현악] 프로코피에프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jubila 2023. 12. 12. 00:10

프로코피에프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Prokofjew, Violin Sonata No.1 in F minor, Op.80
프로코피에프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Sergej Sergejewitsch Prokofjew, 1891-1953
I. Andante assai,   II. Allegro brusco,   III. Andante,   IV. Allegrissimo - Andante assai, come prima


Kyung-Wha Chung plays










이곡의 초연은 1910년 2월 21일(구 러시아 력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가의연주로 초연되었으며 V.M 모로레프에게 헌정되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는 2곡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위한 소나타를 남겼고 두곡 모두 거의 같은 시기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 의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소나타 2번 D장조 작품 94는 1942~44년에 걸쳐 만들어진 플륫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을 작곡자인 프로코피에프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조언에 의해 1944년 봄 피아노반주 원곡을 살리는 범위내에서 바이올린용으로 편곡한 것이다. 이곡은 파리 망명시절부터 교우관계를 맺었던 요제프 시게티(Josef Szigeti)에게 헌정되었다.
1942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중 중부 러시아의 알마타에서 착수되어 이듬해 8월 우랄의 페르미에서 거주하던 도중 완성한 <플륫 소나타>는 1943년 12월 7일 바리코프스키의 플륫, 리히터의 피아노로 이루어졌고 호평을 받았고 이 바이올린 소나타 제 2번작품은 1944년 6월 17일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 레프 오브린의 피아노에 의해 이뤄졌다.
쇼스타코비치도 생전에 이곡을 높이 평가했으며 오늘날에는 원곡인 플륫 소나타보다 더 자주 연주되고 있다. 1번 소나타가 악전고투의 심각한 분위기라면 2번 소나타는 침착하고 다정다감하게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곡은 원래 플륫 소나타로 만들어져서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멜로디가 넘친다. 원 곡과의 비교에서는 피아노 파트는 똑같고 바이올린 파트는 악기에 맞춰서 중음부분을 추가하는 등의 편곡이 이뤄진다. 더 세밀한 부분으로 들어가자면 제1악장의 전반부분에서는 같은 곡의 악보라도 오리지널 플륫 파트로 연주하는 것과 오이스트라흐에 의해 바이올린용으로 변경한 것과는 바이올린의 음색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연주 시 어느 쪽을 사용할 것인지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판단이다.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9곡의 피아노소나타를 작곡하였다.(10번은 미완성) 이 9곡의 피아노소나타가 작곡된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창작가로서의 전시기에 걸친것이며, 이 9곡의 소나타를 들어보면 이 작곡가의 생애에 걸친 작풍의 변천과정을 이해할수 있게된다. 프로코피에프는 현대 작곡가중에서 피아노라는 표현수단을 씀으로써 가장 풍성한 성과를 올린 작곡가의 한사람이다. 물론 러시아에는 안톤 루빈스타인에서 라흐마니노프에 이어져온 피아노음악의 전통이 있다.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음악은 그러한 19세기의 피아노음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을뿐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에 다시 야성적인 다이나믹한 표현을 가함으로써 피아노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이룩하였다고하여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드뷔시이래로 피아노음악분야에서 올린 가장 주목할만한 그리고 가장 풍성한성과를 올렸던것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곡 이전에 6곡의 소나타에 손을 댔다. 그것들은 음악원의 작곡가 학생시절의 습작으로써 초고상태로 남겨졌다. 그중의 3곡이 흔히 개작되어서 <제1번>,<제3번>,<제4번>의 소나타로써 발표되었다. <제1번>의 소나타 원곡은 1907년의 F단조의 소나타인데, 1909년에 이를 개작하면서 뒤의 두개악장을 삭제함으로써 단일악장으로 만들었다. 원곡의 작곡연대로 보아서 프로코피에프의 개성적 요소는 별로 나타나있지 않으나, 당시 그가 영향받은바 있는 스크랴빈의 초기 양식에 가까운 낭만적인것을 느끼게하는 작품이다. 
 
 
알레그로 F단조 12/8박자. 소나타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첫머리에 화음과 반음계적 하강음형의 강주로 시작되는 4마디의 도입부가 놓여져 있다. 제시부의 제1주제는 F단조인데, 왼손의 분산화음위에 등장, 되풀이 되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패시지를 거쳐서 몰토 리타르단도로 구획되어진다. 제2주제는 Ab장조로 중성부에 선율이 노래되고 1도씩 높여지면서 발전하는형태가 반복된다. 그 후에 제2주제의 반진행형으로 보이는 주제가 나타나서 격심한 고조를 보이고 리타르단도로 맺는다. 전개부에 상당하는 부분은 휴지뒤에 조용하게 시작되는 매끄러운 곡상으로부터인데 제1주제를 연상케 하는것은 리듬형뿐이고 제2주제도 단편적이어서 극히 자유로운 취급을 받으며 마지막은 4/4박자의 화려한 클라이 맥스가 된다. 재현부는 변형된 제1주제로 시작, 제2주제는 Db장조인데 그 후부분도 확대되고 끝으로 첫머리의 도입부를 회상하면서 힘차게 끝난다. 


프로코피에프(Sergej Sergejewitsch Prokofjew, 1891-1953)
 
남러시아의 농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 음악 교육을 받고, 5세 때 이미 작곡을 하는 등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1904년(13세)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2)을 비롯한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신진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한 R.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나 드뷔시(프랑스)의 음악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러시아 고전 음악과 서구 근대 음악과의 모순에 괴로와하면서 결국 전통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14년(23세) 음악원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런던에서 러시아 발레단의 주재자인 디아길레프를 만나, 그 발레단을 위한 「알라와 롤리 Ala i Lolli」(1914), 「어릿 광대 Skazka pro shuta」(1915)를 작곡했다.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의 해였지만, 그는 밝고 건강한 18세 기풍의 「고전적 교향곡」을 완성하여 이듬해에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망명을 결심한 프로코피예프(러시아)는 이 해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6월에 일본에 도착, 3회의 연주회를 연 뒤 8월에는 미국에 건너갔다. 1918년부터 2년간의 미국 체류 중에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해 「피아노 협주곡 제3번」(1921)과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L’amour des trois oranges」(1919) 등을 작곡했지만 호평을 받지 못했다. 1923년부터 파리로 이주해, 디아길레프를 위한 「강철의 춤 Le pas d’acier」(1925)과 그 밖의 발레 음악, 「제2번」(1924)에서 「제4번」(1930)까지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제4번」(1931), 「제5번」(1932) 등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의 특징이었던 무내용의 추상적인 서구 모더니즘은 결국 그의 작품 창조의 원천이 되지 못했고, 작곡가로서의 위기 의식을 느낀 그는 1932년(41세) 러시아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이미 습득한 모더니즘의 기법을 평이한 형식과 결합시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쓰고자 노력했는데, 그 산물로 모음곡 「키제 중위 Lieutenant Kijé」(1934),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1935),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에트 Romeo and Juliet」(193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영화 음악에 바탕을 둔 칸타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9)는 그의 민족적 공감의 열렬한 표현이었다.
 
독 · 소 전쟁 발발 후에도 그 적극적인 창작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1944년(53세)에 완성시킨 걸작 「교향곡 제5번」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에는 다시 서구적 형식주의 경향이 강해져, 1948년(57세)에 구소련 음악회의에서 지다노프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이 해에 그는 프라우다(Prauda)에 자기 비판의 글을 발표했으며, 그 이후의 작풍은 「교향곡 제7번(교향곡)」(1952)으로 대표되는 극히 간명 평이한 고전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우랄 민요에 의한 발레 「석화」에서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지만, 완성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로코피예프(러시아)는 전통적인 러시아 음악과 서유럽의 형식주의와의 모순에 항상 괴로와했던 작곡가였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풍은 크게 변화해 왔지만, 결국은 차이콥스키(러시아)에서 현대에 이르는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그 밖에 「피터와 이리」(1938), 「피아노 소나타 제7번(독주곡)」(1942) 등이 있다.




Prokofjew, Violin Sonata No.1 in F minor, Op.80
Gidon Kremer · Martha Argerich

 

I. Andante assai,  

 

 

 II. Allegro brusco,   

 

 

III. Andante,   

 

 

IV. Allegrissimo - Andante assai, come pr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