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terday When I Was Young - Charles Aznavour
Yesterday When I Was Young Sung By Charles Aznavour Yesterday when I was young The taste of life was sweet as rain upon my tongue I teased at life as if it were a foolish game The way the evening breeze may tease a candle flame The thousand dreams I dreamed the splendid things I planned I always built, alas, on weak and shifting sand I lived by night and shunned the naked light of day And only now I see how the years ran away Yesterday when I was young So many drinking songs were waiting to be sung So many wayward pleasures lay in store for me And so much pain my dazzled eyes refused to see I ran so fast that time and youth at last ran out I never stopped to think what life was all about And every conversation I can now recall Concerned itself with me, and nothing else at all Yesterday the moon was blue And every crazy day brought something new to do I used my magic age as if it were a wand And never saw the waste and emptiness beyond The game of love I played with arrogance and pride And every flame I lit too quickly, quickly died The friends I made all seemed somehow to drift away And only I am left on stage to end the play There are so many songs in me that won't be sung I feel the bitter taste of tears upon my tongue The time has come for me to pay for yesterday when I was young |
샤를르 아즈나부르는 1924년 5월 22일생으로 프랑스의 생 제르망 드프레(Saint-Germain-des-Pres)에서 태어났고, 미국계 이민자 부모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후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서양인치고는 왜소한 체격와 프랑스계와 다른 독특한 이목구비로 인해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가족이 이미 연예계에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일찍이 아역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뮤지컬 단체의 일원으로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파리에서 우연히 음악 감독이자 가수인 피에르 로슈(Pierre Roche)와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 가수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피에르가 자신의 아파트를 개조해서 운영한 '샹송 클럽'이라는 곳에서 샤를르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시와 노래를 접하고, 자신도 직접 가사와 곡을 쓰면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을 확보했다. 그 후 거의 8년간 피에르와 함께 듀엣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1946년에는 레이몽 베르나르(Raymond Bernard) 감독의 '잘 가요, 내 사랑(Adieu Cherie)'에 처음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서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1946년 미셀린 루겔(Michelin Lugel)과 첫 결혼을 했으나, 8년 만에 이혼한 뒤 그의 인생과 음악에 있어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인물인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게 되었다. 에디트는 처음엔 피에르와 샤를르를 자신의 투어 팀에 합류시켰고, 피에르가 그와 결별한 이후에는 그를 솔로로 활동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혼까지 이르지 못하고 결국 결별했다.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 그는 캬바레 싱어로서의 침체기를 뛰어 넘어 1954년에는 물랑 루즈, 다음 해에는 프랑스 뮤지션에겐 꿈의 무대인 올랭삐아 무대에 진출하면서 진정한 샹송가수로 인정받았다. (물론 영화 배우로서도 50년대 후반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6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는 내놓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La Mamma], [Les Feuilles Mortes], [Le Temps, Et Pourtant]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그를 대표하는 트랙들이다. 그리고 그의 무대는 자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국 카네기 홀(1964년), 런던 애버트 홀(1967년) 등 세계로 범위를 넓혀갔다. 결국 그는 영-미 대륙에서도 배우와 가수로서 확실한 기반을 닦았고, 아예 헐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까지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등 미국의 인기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매력적인 보이스는 영화에서도 빛났기에, 당시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그를 매우 선호했었다고 한다. 70년대에 가수로서 그가 거둔 또 하나의 성과는 샹송 보컬로서 영국 차트에서 당당히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일이다. 바로 그 곡이 우리에게는 영화 '노팅 힐(Notting Hill)' OST에서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가 리메이크했던 [She]였다. 그 후에도 80년대와 90년대에도 그는 꾸준히 음반을 발표했고, 음악 활동과 별개로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난과 인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회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선보여 그의 팬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특히, 1998년 아르메니아 지진 사태로 피해를 입은 난민들을 위한 자선 싱글 [Pour toi Arm?nie]는 프랑스의 대표적 가수들이 모두 참여했고, 프랑스 차트 18주간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유네스코에서 아르메니아 영구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자신이 거둔 기금을 해당 국가의 재건을 위해 전액 희사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로 그는 '은사'의 대접을 받았고, 작년에는 해당 국가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84살이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재도 신보를 내고 월드 투어를 가질 만큼 건강한 몸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쿠바 여행을 하며 받은 영감을 반영한 앨범「Colore Ma Vie」를 내놓은 2006년에 그는 미국과 캐나다를 도는 'Farewell Tour(고별 투어)'를 가졌지만, 결국 이것이 그를 은퇴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故) 딘 마틴(Dean Martin)과의 듀엣곡으로 화제를 모았던 앨범「Forever Cool」이 발매된 2007년에는 아시아와 일본에서, 그리고 작년에는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그리고 향후 투어 일정이 (건강이 허락하는 한) 2010년까지 잡혀있을 정도로 그는 영원한 '청춘'을 구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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