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 - 교향곡 제1번
Dvorak Symphony No.1 in C minor, Op.3 "The Bells of Zlonice" 드보르작 교향곡 제1번 C 단조 "즐로니체의 종" Dvorak, Antonin Leopold 1841~1904 |
I. Maestoso- Allegro, II. Adagio di molto, III. Allegretto, IV. Finale .Allegro animato, London Symphony Orchestra Witold Rowicki |
드보르작의 최초의 교향곡1번인 이 곡은 1865년 3월 24일 체코에서 작곡되었다. 또한 이 곡의 초연은 훨씬 늦은 1936년 10월4일 체코의 부르노 주립 극장의 연주에서 밀만 삭스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곡이 이렇게 늦게 초연된 것은 드보르작이 독일의 작곡 콩쿨에 이 곡을 제출했었지만 낙선 하였고 악보는 반송되지 않아 분실되었다가 1882년 프라하의 역사학자 루돌프 드보르작이 라이프찌히의 중고 악보 서점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즐로니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으로, 드보르작이 거기서 음악의 기초를 배울 때의 추억을 기억하고자 붙인 이름이나, 제목과 음악의 내용이 서로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1번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과 음악의 흐름이 유사하다고 전해지고있다. 이 곡은 드보르작이 독일의 작곡 콩쿠르에 제축했으나 낙선하고 악보도 반송되지 않아 분실되었었다. 차후 1882년, 프라하의 역사학자 루돌프 드보르작이 라이프치히의 중고 악보 서점에서 발견 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의 작품을 흔히 “국민주의 음악”의 부류에 포함시키는데, 이 개념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때까지 서양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던 독일이나 프랑스, 이태리 등의 음악에 대한 기타지역 민족의 재인식에 바탕을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선도한 러시아에 이어 이 주류의 대세에 합세한 나라가 바로 체코슬로바키아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6세기 중반부터 400년 이상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세계 제 1차 대전 후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그리고 모라비아의 3개 지역이 통합되었을 때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 지역의 민속 음악 리듬이 포함되어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 형태를 보이게 되는데, 체코의 국민음악가로 불리는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 이를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다. 드보르작은 선배들인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그리고 바그너와 리스트까지 많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스메타나를 만난 후부터 차츰 독자적인 음악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렇다고 스메타나와 같은 류의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드보르작의 홀로서기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브람스이다. 순수음악이 19세기의 시대 상황에 맞물려 정체할 때 고전파 음악의 기존 형식에 민족주의 음악을 절묘하게 붙여낸 새로운 분위기의 음악이 등장하게 되는데, 드보르작 또한 이 흐름에 동조함으로서 혁명적인 냄새가 강한 스메타나의 음악과는 구분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드보르작은 체코의 민속 무곡을 가미하여 체코 특유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완성시켜 나갔고 미국에서 만든 작품들도 이에 연계하여 흑인 영가나 심지어는 인디언들의 음악도 조국인 체코의 음악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1번 교향곡에 등장한 “즐로니체(Zlonice)”는 체코 수도 프라하의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이름으로 드보르작이 거기서 음악의 기초를 다진 추억을 기억하고자 작품에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악보에는 부제가 없으며 또한 이 곡 내내 종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치 종소리의 잔향이 퍼지듯 그가 알리고자 하는 외침이 몰려오는 것 같다. 아쉽게도 그의 교향곡 작품들 중 생전 유일하게 연주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작품이라고 한다. 드보르작의 작품에는 드물게 이 1번 교향곡에는 C 단조를 사용하여 베토벤의 5번 교향곡과 음악의 흐름이 유사하다고들 하는데, 이런 성격 탓인지 드보르작의 교향곡들은 다소 경직되어 있어서 뼈대 굵은 동구권 악단의 해석이 대체로 서구권 악단의 그것보다 낫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체코의 노이만을 빼놓고 드보르작 교향곡을 얘기할 수는 없겠다. “노이만의 드보르작” 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노이만의 해석은 절대 호연으로 분류되고 있으니 말이다. 1악장 파곳과 혼의 선율, 4악장 피치카토에서 보여주는 섬세한 해석은 단연 발군이다.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 (체코어: 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년 9월 8일~1904년 5월 1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풍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자크는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을 겸한 여관의 주인으로, 전문적인 치터 연주자였다. 아버지는 가업을 계승시킬 생각으로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13세부터 15세에 걸쳐 외삼촌이 있는 즈로니체라는 곳에 보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일찍이 가업을 승계시키려는 아버지의 의사를 무시하고 음악공부만을 하고 있었다. 독일어 선생은 오르간 연주가이기도 했던 리만이라는 유능한 음악가였다. 그 뒤 작센과의 국경 근처 체스카카메니체라는 곳에 공부하러 보냈으나 역시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 때에 드보르자크는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 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친교를 맺고, 재학중부터 오케스트라에 가담하여 바이올린을 켜서 수확을 올렸다. 특히 그 오케스트라가 당시 첨단을 걷고 있던 바그너를 채택하고 있던 관계도 있어 드보르자크는 퍽 오래도록 바그너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바그너식의 오페라나 음악극의 체코판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멜로디나, 특히 화성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였다. 드보르자크는 꽤 노력형이어서 학생시절부터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프라하의 일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출연하고 있던 갈레루 코므자크악단에 가담하여 비올라를 켜게 되었으나 1842년에 체코인을 위한 국민극장이 건설될 때까지의 임시극장이 개관되어 악단과 더불어 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이 되어 약 10년간 근속하였다. 1866년부터 스메타나가 이 극장의 오페라의 감독에 취임, 자작의 오페라 등을 지휘하게 되었으므로 바그너, 슈베르트나 베토벤의 영향과 함께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그의 작풍을 채색하게 되었다. 드보르자크는 오케스트라 동료들로부터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으나 묵묵히 작곡을 하였으며 특히 1861년(20세 때)부터 실내악의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또 1865년부터 교향곡(제1과 제2를 이해에)을 작곡한 것은 당시의 슬라브계의 민족음악의 작곡가들이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대체로 이와 같은 순음악보다도 표제음악이나 오페라에 끌려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드보르자크의 이러한 순음악에 대한 정열은 죽기 약 9년 전인 1895년까지 계속된다. 후기 낭만적 음악의 화성조직이나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사용법이라든가 그러한 개개의 기법에 이끌렸어도 고전적인 음악형식을 저버리려고 하는 그 무렵의 작곡계의 일반적인 경향에는 반대였고 새로운 고전주의를 목표로 한 점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브람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사실 브람스에게는 매우 총애를 받아 드보르자크의 작품이 1877년 이후 베를린의 지므로크 음악출판사로부터 출판하게 되었고,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브람스 소개로 된 것이었다. 이 브람스를 비롯하여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뷰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 당시 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평론가 한스리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인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드보르자크의 명성과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1884년 말 영국에서만도 9회나 초빙되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국제인으로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끝까지 체코인으로 살아갔다. 빈으로 이주하도록 재삼 권유된 것을 거절한 것도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빈 정부에 대해 독립투쟁을 밀고 있던 동포들을 버리고 자신만 빈에서 안일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자크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의 것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하다)하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더 오래도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도중에 파기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귀국 후 만년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사망, 국장으로 모셔졌다.드보르자크는 이른바 귀재형의 음악가는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평범 속에 위대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겠다. |
Dvorák, Symphony No. 1 in C Minor, Op. 3 "Bells of Zlonice" Producer: David Mottley Associated Performer: The Philharmonia Orchestr |
1. Allegro |
2. Adagio molto |
3. Allegretto |
4. Finale. Allegro anima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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