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Nashville

[올드팝] Oh My Darling Clementine

jubila 2024. 2. 15. 19:40

Oh My Darling Clementine












Oh, My darling Clementein


Muffin Songs,  Connie Francis,  Mitch Miller,  해바라기

In a cavern, in a canyon, 
Excavating for a mine,
Dwelt a miner, forty-niner,
And his daughter Clementie.
 
Chorus :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 Clementine.
 
Light she was, and like a fairy,
And her shoes were number nine;
Herring boxes without topses,
Sandals were for Clementine.
 
Drove she ducklings to the water
Every morning just at nine;
Hit her foot against a splintr,
Fell into the foaming brine.
 
Ruby lips above the water, 
Blowing bubbles clear and fine;
But alas, I was no swimr,
So I lost my Clementie.
 
Then the miner, forty-niner,
soon began to peak and pine,
Thought he oughter join his daughter,
Now he's with his Clementine.
 
There's a churchyard on the hillsie,
Where the flowers grow and twie,
There grow roses amongst the posis,
Fertilized by Clementie.

In my dreams, she still doth haunte
Broken garments soaked in brie;
though in life I used to hug her,
Now she's dead I draw the line.
 
Now you scouts may learn.
The moral of this little tale of mie,
Artificial respiration,
would have saved my Clementine.
 
How I missed her, how I missedr, 
How I missed my Clementine;
Then I kissed her little sister
And forgot my Clementine. 
동굴에서, 협곡에서,
금광을 찾아 땅을 파헤치며,
1849년의 금광 미치광이 시절에 한 금광부가
그의 딸 클레멘타인과 살았었다네

합창 :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아,
 네가 세상을 떠나 영원히 먼길을 갔으니,
참으로 슬프구나, 클레멘타인아.

그녀는 쾌활하였고 요정 같았지,
 그녀의 신발치수는 9호 (커다란 발)이었네.
덮개 없는 청어상자로 만든 샌들이
클레멘타인이 신고 다니는 신발이었네.

그녀는 새끼오리들을 물가로 몰고 갔어
매일 아침 9시 정각이면 말이야.
어느 날 그녀의 발이 나무토막에 부딪혀
그녀는 그만 거친 바다에 떨어져 버렸어.

물위에 떠오른 루비 같은 그녀의 입술
 입에서 나오는 거품이 맑고 순수하였네
그러나 슬프도다, 나는 헤엄을 못치는 바보,
 그렇게 나는 나의 클레멘타인을 잃었다네.

그래서 1849년의 금광 미치광이 광부는
차츰 몸이 여위어 갔네
그의 딸과 함께 지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그는 지금 그의 딸 클레멘타인 곁에 있다네.

언덕위에 있는 교회묘지에는
꽃들이 무성하게 자라 뒤엃혀있지
꽃중에  장미가 잘 자라는데
클레멘타인이 땅을 기름지게 했나봐.

내 꿈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내게 나타나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찧긴 옷을 입고서.
살아 생전에는 내가 그녀를 자주 껴안았었지만
이젠 그녀가 떠났기에 나는 한계를 그어야 했네.

이제 소년소녀 스카우트 단원 여러분들은
이 작은 내 이야기를 듣고 교훈을 배웠을거야
인공호흡만 했어도
내 클레멘타인을 살릴 수 있었지.

그녀가 얼마나 보고싶은지, 얼마나 그리운지,
내 클레멘타인이 몹시 보고 싶었네.
나는 그녀의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키스하고 내 사랑 클레멘타인을 잊게 되었네.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해바라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바람부는 하루날에 아버지를 찾아서
바닷가에 나가더니 해가 져도 않오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Muffin Songs,

 

 

 

Connie Francis

 

 

 

Mitch Miller

 

 

 

클레멘타인,   해바라기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900년대 초기에 "올드 랭 사인", "메기의 추억" 등과 같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로 들어온 외국 노래였는데 이 때 가사는 양악계의 원로인 박태준 박사의 형님되는 박태현씨의 번안 가사라고도 전해진다.
삼면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가사가 바뀐 이 애조 띤 노래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에 절망하고 있던 우리 민중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

1946년 존 포드 감독의 "황야의 결투(원제:My darling Clementine)"에서

타이틀 곡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헨리 폰다가 주연을 맡았고 서부역사의 전설적인 보안관인 와이어트 어프와 품위있고 우아한 아름다운 처녀 클레멘타인과의 사랑을 노래했던 작품으로 서부 개척시대 사람들의 어려움과 정의를 수호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의로운 정서를 나타낸 영화는
존 포드 감독의 후기 역작으로 오늘날까지 평가되고 있다.


클레멘타인(영어: Oh My Darling, Clementine)은 미국 서부의 민요로 일반적으로 퍼시 몬트로즈가 1884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바커 브래드퍼드을 언급하기도 한다.
또,
1863년 발표된 헨리 S. 톰슨의 Down by the River Liv'd Maiden 가사을 바탕으로 작사된 것으로도 보고 있다.
가사는 1848년부터 1855년간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일어났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이주해온 광부가 수해로 딸을 잃은 후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스페인 관련 작품을 쓴 영국인 작가 제럴드 브레넌은 클레멘테인의 원곡은 스페인의 옛 발라드 곡으로 골드러시 때에 멕시코인 광부들 사이에 널리 퍼져고, 이 곡에 여러 영어 가사를 붙여 노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Clementein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포티-나이너(forty-niner)' 들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불렀던 노래였다"

노래에 나오는 "포티나이너"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황금을 캐기위해 캘리포니아의 광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말한다.
184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의 어느 제재소에서 일하던 목수에 의하여 시작된 골드러시는 당시 미국 사회를 열병으로 끓어 오르게 하였다.
각국 각지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서 북부 아메리카의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직장을 팽개치고 노다지를 캐기위해 광산으로 향하였다.
그중에는 공무원도 있었고 신문기자도 있었으며, 군인, 의사, 판사 등 상류층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공장과 사무실은 휴업을 하고, 선원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선원들을 구하지 못해 선주들은
배들마저 운항을 중지할 정도였다.
미국인뿐만아니라 유럽, 남미, 중국 등 외국에서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광부가 되어 1848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어치의 금을 캘리포니아의 광산에서 캐냈다.
물론 당시로서는 아주 큰 돈이었지만 "포티나이너"들 모두가 거부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포티나이너"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가혹한 노동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거친 노동과 부실한 식사로 인한 영양실조와 인디언의 습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힘들게 일을하고 집에 들어가면 숭숭 구멍뚫린 지붕에선 비가 새고, 편안히 쉬어야 할 방안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가 일쑤였고, 옷은 제대로 입을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피땀 흘려 캐낸 황금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 돈많은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허탈감에 사로잡힌 "포티나이너"들 사이에서는 자조적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굴과 계곡에서 금맥을 찾는 한 포티나이너에겐 클레멘타인이라는 딸이 있었지.....
이렇게 시작하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는
"포티나이너"들의 슬픔과 눈물이 담긴 상실의 노래였던 것이다.


                       



49er --- 포티나이너 (Forty-Niner),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였던 1849년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사람들... 

1848년 1월 23일,
북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아메리카 강변의 한 제재소에서 일하던 제재공에 의해 발견된 사금으로 시작된 골드 러시는 당시 미국 사회를 황금 열병으로 끓어 오르게 하였고, 미전국 각지의 2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멀리 유럽, 남미, 중국 등 외국에서도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 들었다고 한다.

개울 폭포 어우러진 왕복 8Km,

플래서리타 캐년 자연 공원 에서는 프렌시스코 로페즈라는 운 좋은 광부가 떡갈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산신령을 만나 노다지(No touch)를 캐고, 떼돈을 벌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훠리-나이너들이 1849년부터 1858년까지 대략 10년 동안 
당시 시세로 5억5천만 달러 상당의 금을
캘리포니아에서 캐 냈다고 한다.

지금 시세로 환산해 본다면 엄청난 액수이겠지만,
49er들은 일확천금의 꿈으로 고된 생활을 감수해야 했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금이란 하천 하류의 모래 삼각지 속에서 채에 걸려져 찻아 내는 Dust Gold 또는 Alluvial Gold라 불리우는 사금(沙金)이 가장 많았으며 땅속 굴에서 찾는 양은 미미 했다. 해서 49er들이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인적드문 계곡 (In a canyon)에 또 하천에 살았다. 워낙 못살아 어린 딸에게 어디선가 줏어온 사이즈 9(250mm)의 큰 신발을 신키기도 했지만 (Her shoes were number nine), 주로 뚜껑 없는 말린 청어 상자를 짤라서 끈을 끼여 샌들을 만들어 주었고...

(Herring boxes, without topses, sandals were for Clementine.)

어린 딸 클레멘타인은 매일 아침 거위를 몰고 강가로 나갔고
(Drove her ducklings to the water ev'ry morning),
아버지는 금을 찾는 일을 하였답니다.

어느날 그만 아이가 급류에 휩쓸리였는데, 아버지를 비롯하여 주위에 수영을 할줄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고 (I was no swimmer)...
이렇게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함께, 타향살이의 외로움, 개척생활의 고통과 동반한 위험, 등등 프론티어들의 삶의 애환을 반영한 슬픈 노래라고 느껴 진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3.1운동 직후부터라고 한다. 소설가 박태원씨에 의해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가사가 번안된 이 애조 띤 노래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에 절망하고 있던 우리 민중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