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가곡] 강이 풀리면 (오동일 작곡, 김동환 작시) - sop. 김순영

jubila 2024. 2. 20. 16:51

강이 풀리면 (오동일 작곡, 김동환 작시) - sop. 김순영











강이 풀리면
김동환 작시 오동일 작곡
 


sop. 김순영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오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타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님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 멋에 녹는데 왜 아니 오실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오겠지
님은 안 타도 소식은 있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님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 멋에 녹는데 왜 아니 오실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김동환 시인 (1901~미상)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파인(巴人)이다. 아버지 김석구(金錫龜), 어머니는 마윤옥(馬允玉)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필명으로는 강북인(江北人), 초병정(草兵丁), 창랑객(滄浪客), 백산청수(白山淸樹) 등을 썼다. 아명은 삼룡(三龍)으로, 1926년 10월 동환(東煥)으로 개명하였다.

1908년 공립 경성보통학교(鏡城普通學校)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6년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10월 중동중학교 4학년 재학 당시 고학생 갈돕회 현상모집에서 그가 쓴 시 「이성규(異性叫)와 미(美)」가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1등에 당선되어 『학생계』에 실렸다. 1921년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4년 5월 『금성』에 시「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사(北鮮日日報社) 조선문판 기자로 복무했고,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어 1925년 5월까지 근무했다. 1925년 3월 첫 시집인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1925년 8월부터 카프(KAR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외일보』 사회부기자,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일보』 사회부 차창을 지냈다.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종합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간행했다.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조선가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삼천리』의 자매지로 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했다.

1939년 3월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의 실해위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참여해 간사를 맡았다. 1940년 5월 『애국대연설집』을 편집·발간했다. 1941년 1월 도쿄의 모던일본사가 주관하는 제1회 조선문학상의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같은 달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이 되었다. 8월에는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상무간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경기도 준비위원, 임전대책협력회 준비위원과 상임위원을 맡았으며,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가 되었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경성부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이 공동 주관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의 강사로 선출되어 경성부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5월 『삼천리』를 『대동아(大東亞)』로 개명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위원과 참사로 활동했고, 1943년 8월 징병제가 시행되자 『매일신보』에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발표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1944년 7월 『조선동포에게 고함』을 편찬·간행했으며, 같은 해 9월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6월 대화동맹의 자매당인 대의당(大義黨)의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2월 조만식이 이끈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8월 여러 기행문을 엮은 『삼천리강산』을 편찬해 발간했다. 1948년 5월 삼천리사를 재차 창립하고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자수했고,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문단활동으로는 1925년 제1시집 『국경의 밤』과 제2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靑春)』을 간행했고, 1929년 주요한(朱耀翰)·이광수(李光洙)와 함께 제3시집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을 펴냈다. 이어 1942년 제4시집 『해당화(海棠花)』를 발간했다. 납북된 후 1962년 최정희(崔貞姬)가 그의 유고를 모아 제5시집 『돌아온 날개』를 펴냈다. 저작물로는 1932년 『삼천리』에 실린 논설들을 모은 산문집 『평화(平和)와 자유(自由)』, 1936년 시·소설·평론을 함께 묶은 『조선명작선집(朝鮮名作選集)』, 1941년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半島山河)』, 1952년 수필집 『꽃피는 한반도(韓半島)』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