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Baroque

[연주곡] Romance / Dmitri Shostakovich

jubila 2024. 4. 11. 09:28

Romance / Dmitri Shostakovich











Romance



Dmitri Shostakovich

작곡














 




 

 














이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원래 'The Gadfly (등에: 소, 말등의 가축에 붙어 괴롭히는 곤충)라는 영화의

배경 음악으로 작곡된 곡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합스부르크 통치 하에 있던 이탈리아에서의 한 혁명가를
비유한 것이었는데,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소비에트 체제에 그칠 줄 모르고 반항하던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좋아했을지는 모르지만 영국에서는 한 때, 템즈 텔레비젼 시리즈 " Reilly , Ace of Spies" 에 이 로망스 멜로디가 쓰여 인기를 끌기도 했다고 한다.
어떤 영화 어떤 장면에 사용되었든지 음악 자체가 대단히 로맨틱하기 때문에 항상 대중적 인기를 몰고 다니는 명곡이다.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출생.  어려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27) 《제3교향곡》(29), 그리고 《피아노·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33)
《피아노전주곡집》, N.V.고골리에 의한 오페라 《코》(30), 발레 《황금시대》(30)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 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1927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1937∼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 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쇼스타코비치는 작곡을 통해 러시아인들의 공통된 불행과 운명을 나누어 가진 것뿐만 아니라 제도와 체제에 저항했다. 또 인간의 혼을 개조해 버리려는 압제와 비인간적인 권위에 저항했다”고 ‘프로무지카’지의 요시프 라이스킨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추모의 글을 남겼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고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페스티벌을 통해 러시아인의 삶을 자신의 음악 테마로 만들었던 쇼스타코비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자신의 스승인 쇼스타코비치를 기리는 이 페스티벌을 단 한 번만 그것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만 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한 쇼스타코비치

1966년 그의 60세 생일을 기념하는 이날 첼로 협주곡 2번 초연이 있었다.
* 60년대 초반부터 심장 계통의 건강 악화에 시달려 온 그는 이전보다 더 왕성한 작곡 활동을 보여주었다.
심장 발작 후 모스크바 근교인 쿤체보의 병원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작곡에만 전념한다. 이 시절의 성악 작품으로는 ‘블록의 시에 의한 7개의 로망스’ Op.127, ‘마리나츠베타에와의 시에 의한 6개의 로망스’Op.140,
‘미켈란젤로의 시에 의한 모음곡’ Op.145 등이 있다.

소프라노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에게 바쳐진 ‘블록의 시에 의한 7개의 로망스’는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 바인베르크의 피아노 연주로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요양 중이던 쇼스타코비치는 라디오를 통해 이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비올라 소나타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1975년 8월 9일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